초원은 유라시아의 변두리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였다. 동쪽 끝과 서쪽 끝을 잇는 길이 여기를 지났고, 이곳에서 시작된 충격은 수천 킬로미터 밖까지 전해졌다.
기원전 2세기, 흉노에 밀린 월지가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중앙아시아로 옮겨 가 세운 나라가 쿠샨 제국이고, 거기서 만들어진 불상 양식이 비단길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 한반도까지 온다. 초원의 한 번의 압력이 우리가 아는 불상의 얼굴을 만든 셈이다.
서기 4세기에는 더 큰 연쇄가 일어났다. 중앙아시아에서 밀려온 세력이 흑해 북안의 고트족을 무너뜨렸고, 밀려난 고트족이 로마 국경으로 쏟아져 들어갔으며, 그 도미노가 결국 서로마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로마 편의 375년 시점이 바로 그 장면이다.
1세기 말 서쪽으로 사라진 북흉노와 4세기 유럽의 훈족을 잇는 견해가 오래 제기되었지만, 언어와 고고학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학계는 확정하지 않는다. 다만 두 사건을 직접 잇지 않더라도, 초원의 이동이 유라시아 전체에 연쇄를 일으켰다는 큰 그림 자체는 다투지 않는다.
초원을 빼고 유라시아사를 쓰면 로마가 왜 무너졌는지, 인도에 왜 이슬람 왕조가 들어섰는지, 중국 왕조가 왜 그토록 자주 바뀌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역사를 정주 문명 중심으로 배우면 우리는 무엇을 놓치게 될까? 기록을 남기지 않은 쪽의 영향력은 어떻게 측정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