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을 바친 쪽이 중원이었을 때

-198 · 중국 산시성 다퉁 (백등산)

기원전 200년 한 고조가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치러 나섰다가 백등산에서 포위되었다. 이레를 갇혔다가 겨우 빠져나온 뒤 맺은 화친의 내용은 이랬다. 한이 흉노에 해마다 비단과 곡식과 술을 보낸다. 황실의 여성을 시집보낸다. 형제의 예를 갖춘다.

물자는 중원에서 초원으로 갔다. 이 관계가 60년 가까이 이어졌다.

이 사실은 조공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근본에서 흔든다. 조공을 곧 굴종으로 읽는 습관은 후대에 정리된 유교적 세계관, 그리고 근대의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에서 굳어진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조공은 하나의 제도가 아니었다.

어떤 때는 무역 협정에 가까웠다. 조공품보다 답례품이 더 큰 경우가 흔했고, 사행은 수익이 나는 사업이라 정원을 두고 다툼이 벌어질 정도였다. 어떤 때는 정통성 승인 절차였다. 5세기 왜의 왕들이 남조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청했을 때, 백제에 대한 지배권 요구는 거절당했다 — 책봉은 자동 승인이 아니라 심사와 협상이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무력으로 강요된 항복 조건이었다. 병자호란 뒤 조선이 청과 맺은 관계가 그렇다.

그러니 조공을 전부 굴욕으로 읽는 것도, 반대로 전부 무역으로 환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매번 물어야 한다 — 이때 이 관계는 어디쯤이었는가.

같은 이름의 제도가 시기와 상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작동했다면, 우리는 그 제도를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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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초원 제국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