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은 하나의 제도가 아니었다

1793 · 중국 베이징

이 시리즈는 처음부터 하나의 원칙을 두고 왔다. 조공은 단일한 제도가 아니라 스펙트럼이었다는 것이다. 청 편에서 그 말을 정리한다.

같은 해 베이징에는 여러 사절이 있었다. 조선의 사절은 정해진 절차를 따라 정해진 물품을 바치고 책력을 받아 갔다. 이 관계는 수백 년 이어진 것이며 내정에는 미치지 않았다. 상당 부분은 국가가 관리하는 무역이기도 했다 — 사절단을 따라간 상인들이 실제로 큰 거래를 했다.

류큐의 사절도 왔다. 그런데 류큐는 같은 시기 일본의 한 번(藩)에도 복속되어 있었다. 하나의 나라가 두 종주국을 두는 상태가 실제로 가능했고, 양쪽 모두 그것을 알면서 묵인했다.

베트남의 경우는 또 달랐다. 청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고, 이겨 놓고도 사절을 보내 책봉을 받았다. 승자가 형식상 아랫자리를 택한 것이며, 그 형식이 실제 관계를 규정하지는 않았다.

같은 해 영국 국왕의 사절도 왔다. 통상 확대를 요청하러 온 것인데, 청은 이들을 조공 사절의 하나로 처리했다. 황제 앞에서 어떤 예를 갖출 것인가를 두고 실랑이가 있었고 요청은 거절되었다. 흔히 청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인용되지만, 이 무렵 청은 러시아와 대등한 국경 조약을 이미 맺어 두고 있었다. 상대가 조공 질서에 들어올 수 없는 세력이면 다른 방식을 썼다는 뜻이다.

결정적인 것은 조선의 경우다. 1637년의 사대와 1882년 이후의 관계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 어렵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재정과 외교에 직접 개입했으며, 파견된 관리가 국정에 관여했다. 오래된 의례가 근대적 속국화로 성격을 바꾼 것이다.

그러니까 조공이라는 한 단어 안에는 무역 협정에 가까운 것, 즉위를 승인받는 절차, 전쟁 뒤 강요된 조건, 그리고 실질적 간섭이 모두 들어 있었다. 어느 하나로 전부를 설명하면 나머지가 지워진다.

같은 이름으로 불린 관계들이 이토록 다르다면, 우리가 물려받은 역사 용어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한 단어 안에 뭉뚱그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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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