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에서 결정된 것과 결정되지 않은 것

1637 · 서울 송파

1636년 겨울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열흘 만에 한양에 닿았고, 왕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45일을 버티다 나왔다. 이듬해 정월 삼전도에서 항복 의식이 치러진다.

무엇이 결정되었나.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에 사대할 것, 세자와 왕자를 볼모로 보낼 것, 성을 새로 쌓지 말 것, 정해진 공물을 보낼 것. 그리고 수만 명이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중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했고, 돌아온 여성들에게 쏟아진 시선은 또 다른 폭력이었다.

무엇이 결정되지 않았나. 왕조는 유지되었다. 국내의 관제와 법, 과거와 토지 제도는 그대로였다. 청의 관리가 상주하며 내정을 감독하지도 않았다. 몽골 편에서 본 고려의 경우와 비슷하면서도, 원 간섭기처럼 왕실이 혼인으로 편입되지도 않았다.

이 시기를 굴욕의 서사로만 쓰면 왕조와 제도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이 지워지고, 실리 외교의 서사로만 쓰면 끌려간 사람들이 지워진다. 둘 다 적어야 한다.

볼모로 갔던 세자는 심양에서 8년을 지냈다. 그곳에서 청의 관료들과 교섭하고 농장을 경영해 물자를 마련했으며, 베이징에서는 서양 선교사와 접촉해 천문 서적과 기구를 얻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죽었고, 사인을 둘러싼 논란이 오래 남았다. 그의 아내와 아들들도 뒤이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북벌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실제 준비와 실행은 제한적이었고, 논의 자체가 국내 정치의 명분으로 기능한 측면이 크다. 동시에 해마다 사절이 오갔고 그 통로로 청의 서적과 서양 지식이 들어왔다. 겉으로 내건 말과 실제로 오간 것이 달랐다.

한 나라가 굴복했다는 것과 사라졌다는 것은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이의 상태를 어떤 말로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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