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초 미국 대통령이 전후 처리의 원칙을 발표했다. 그 안에 각 민족이 자기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정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민족자결이라 불린 이 말은 곧 전 세계로 퍼졌다.
조선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에는 1892년 맺은 수호통상조약이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 교류는 거의 없었고, 두 사회가 서로에게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이 제국이 무너지는 방식을 통해서였다.
1919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한국에서도 대표가 파견되었고, 상하이와 도쿄와 국내에서 독립선언이 준비되었다. 3월 1일 만세 운동이 시작된다.
같은 해 인도에서는 암리차르에서 집회 군중에 대한 발포가 있었고, 이집트에서 혁명이, 중국에서 5·4운동이 일어났다. 제국들이 무너지고 다시 짜이던 세계적 물결의 한 부분이었다 — 한반도의 저항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과가 있었다. 파리에서 한국 대표는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민족자결 원칙은 실제로 어디에 적용되었나. 무너진 세 제국 — 합스부르크·오스만·러시아 — 의 유럽 영토였다.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유고슬라비아·헝가리가 그렇게 섰다.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인도도, 이집트도, 베트남도, 한국도 그 밖이었다.
원칙을 만든 쪽에서도 그 범위를 두고 이견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분명했다 — 진 쪽의 제국은 해체되고 이긴 쪽의 제국은 오히려 위임통치라는 이름으로 영토를 늘렸다. 대영제국이 최대 판도에 이른 것이 바로 1919년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기대가 배신당했다고만 적으면 부족하다. 그 원칙이 애초에 유럽의 전후 처리를 위한 것이었고 식민지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동시에, 그 말이 퍼진 것 자체가 이후 30년의 흐름을 만들었다는 점도 함께 보아야 한다. 적용되지 않은 원칙이 적용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었고, 그 요구가 20세기 중반의 탈식민을 밀어붙였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 선 나라들도 그 안에 여러 민족을 안고 출발했고, 20년 뒤 그 불일치가 다음 전쟁의 명분이 되었다. 민족자결은 답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문제였다.
어떤 원칙이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보다 멀리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원칙의 주인을 누구라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