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합의하고 나머지는 남다

1867 · 헝가리 부다페스트

이 제국의 인구는 독일어·헝가리어·체코어·폴란드어·우크라이나어·루마니아어·크로아티아어·세르비아어·슬로베니아어·이탈리아어를 썼다. 어느 언어도 절반을 넘지 않았다.

왕조가 여러 지역을 겸하던 시대에 이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왕에게 충성했지 민족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19세기에 민족이 국가의 단위가 되면서다.

1848년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이 제국에서는 그것이 동시에 민족 문제로 나타났다. 헝가리는 독립을 선언했고 체코와 크로아티아와 이탈리아 지역에서도 각자의 요구가 터져 나왔다. 진압에는 러시아 군대가 동원되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헝가리의 독립 요구 안에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 그 영토에는 크로아티아인·루마니아인·슬로바키아인이 함께 살았고, 이들은 헝가리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다. 민족 자결의 요구는 한 겹이 아니었다 — 누구를 단위로 자결할 것인가가 곧바로 다음 문제였다.

1866년 프로이센에 패해 독일에서 밀려난 직후, 제국은 헝가리와 타협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각각 의회와 정부를 갖고 군주와 외교·군사만 공유하는 이중 체제다.

두 민족의 합의였다. 나머지는 그 밖에 남았다. 체코는 같은 지위를 요구했으나 거부되었고, 헝가리는 자기 영역 안의 다른 민족에게 헝가리어 사용을 강하게 요구했다. 자치를 얻은 쪽이 다른 집단에게 같은 것을 주지 않는 구조가 여기서 반복된다.

이 제국을 「민족들의 감옥」이라 부르는 서술이 오래 있었다. 반대로 여러 민족이 공존한 모범이라 보는 서술도 있다. 둘 다 절반이다. 억압이 있었고 동시에 어느 민족도 다른 민족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균형도 있었다. 빈과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에서 여러 언어의 신문이 나왔고, 제국이 무너진 뒤 그 자리에 선 나라들이 소수 민족을 더 강하게 압박한 사례도 있다.

분명한 것은 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연방으로 재편하자는 안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헝가리가 반대했고, 시간이 없었다.

하나의 국가 안에 어느 쪽도 다수가 아닌 여러 집단이 있을 때, 그 국가는 무엇을 기준으로 유지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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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합스부르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