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년부터 7년 동안 아일랜드에서 감자 역병으로 대기근이 벌어졌다. 인구의 약 8분의 1이 죽고 비슷한 수가 떠나, 이 섬의 인구는 오늘날까지도 그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흉작은 자연이 만들었다. 그러나 기근이 그 규모가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감자가 썩는 동안에도 아일랜드에서 곡물과 가축이 영국으로 계속 수출되었다. 구호는 시장의 작동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 아래 제한되었고, 구호를 받으려면 토지를 포기해야 하는 조건이 붙기도 했다.
30년 뒤 인도에서 같은 논리가 반복된다. 1876년부터 3년간 남부와 중부를 덮친 가뭄에 수백만 명이 죽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고 추정 폭이 넓다. 그런데 그 기간에도 인도에서 밀이 수출되었고, 구호 사업의 노동 대가로 지급된 식량은 생존에 필요한 양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당시에도 나왔다. 시장에 개입해 곡가를 조절하자는 제안은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같은 시기 영국 여왕이 인도 여제로 선포되는 성대한 의식이 델리에서 열렸다.
이것을 학살이라 부를 수 있는가는 논쟁이 있다. 고의로 굶겨 죽인 것과, 이념적 원칙을 고수하다 결과적으로 죽게 둔 것은 다르다는 견해가 있고, 결과가 예측 가능했고 대안이 있었다면 그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 아틀라스는 어느 쪽 판정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사실은 적는다 — 흉작이 있었고, 식량 수출이 계속되었고, 구호는 원칙에 따라 제한되었고, 수백만 명이 죽었다.
덧붙일 것이 있다. 같은 시기 인도에는 철도와 전신이 놓이고 근대적 관료제와 법 체계가 들어섰다. 그것도 사실이다. 무엇이 들어왔는지와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함께 적지 않으면 어느 쪽도 정확하지 않다. 다만 철도가 기근 지역에서 곡물을 실어 내는 데도 쓰였다는 사실은, 근대화의 도구가 무엇을 위해 쓰이는가를 묻게 한다.
죽이려 하지 않았지만 죽게 둔 경우, 책임은 어디까지 물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판단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도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