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 열두 마당에서 다섯 마당으로

1870 · 고창(전북) / 남원

판소리는 한 사람이 서너 시간에서 길게는 여섯 시간짜리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내는 공연이다. 소리꾼 한 명과 북 치는 고수 한 명, 그리고 청중이 전부다.

구성 요소는 셋이다. 창(소리)은 노래이고, 아니리는 말로 하는 부분이며, 너름새(발림)는 몸짓이다. 여기에 고수의 추임새 — "얼씨구", "좋다" — 가 끼어들고, 청중도 추임새를 던진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공연 형식이다.

이름의 뜻도 그렇다.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이나 상황을 뜻하고 "소리"는 음악을 뜻한다. 많은 청중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말이다.

【열두 마당에서 다섯 마당으로】 판소리에는 원래 열두 마당이 있었다. 최소한 1810년 이전부터 열두 판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신재효 무렵에는 대부분이 불리지 않았고, 이후 더 줄어 지금은 다섯 마당만 남았다. 「춘향가」·「심청가」·「흥부가(박타령)」·「수궁가」·「적벽가(화용도)」다.

나머지는 사정이 제각각이다. 「변강쇠타령」·「배비장타령」·「장끼타령」·「옹고집타령」은 사설(창본)만 전하고 실제로 불리지는 않는다. 「강릉매화타령」·「무숙이타령(왈자타령)」은 창본조차 전하지 않는다.

사라진 마당들의 면면이 흥미롭다. 「변강쇠타령」은 떠돌이 남녀의 이야기이고, 「배비장타령」은 위선적인 양반을 망신시키는 이야기다. 성과 풍자가 강한 작품들이 먼저 탈락했다. 판소리가 양반층의 후원을 받으며 세련되어지는 과정에서 걸러진 것으로 이해된다.

【신재효라는 인물】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전북 고창의 아전 출신 부호였다. 판소리 사설을 문자로 정리하고 후원한 인물이다.

그는 집안에 노래청을 만들어 명창들과 교류했고, 김세종·정춘풍·진채선·허금파 같은 명창을 길러냈다. 흩어져 전하던 판소리 사설을 여섯 마당으로 정리했다.

이 작업의 평가는 양면적이다. 구전으로만 전하던 것을 문자로 고정해 후대에 남겼다는 공이 크다. 동시에 정리 과정에서 판소리 특유의 즉흥성과 거친 활력이 다듬어졌고, 유교적 관점에서 내용이 조정됐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그의 남창 「춘향가」는 기존 판본의 일부 대목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며 서사 논리를 바꿨다.

진채선은 최초의 여성 명창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고종 4년 경복궁 낙성 축하 잔치에서 노래해 이름을 날렸고, 대원군이 운현궁으로 데려가 대령기생으로 묶어두었다고 전한다.

【판소리계 소설】 판소리가 글로 정착하면 판소리계 소설이 된다. 「춘향전」·「심청전」·「흥부전」·「토끼전」이 그것이다.

이 전환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춘향전」의 경우, 기생의 딸과 사또 아들의 결합을 통해 신분 철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본래 내용은 유지되지만, 신분과 절개 가운데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본이 생겼다.

그리고 후대로 갈수록 춘향의 열녀화(烈女化)에 관심을 두는 방향이 주류가 됐다. 전승 매체가 말에서 글로 바뀌고 향유층이 넓어지면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요소로 열(烈)이 선택된 것이다. 춘향을 그 덕목에 걸맞은 인물로 만들려고 신분을 상승시키는 시도까지 나타난다.

저항의 이야기가 정절의 이야기로 순화되는 과정이다. 대중화가 곧 급진화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읽힌다.

【그때 조선은】 판소리가 형성된 17~18세기는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장시(場市)가 전국에 서던 시기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공연이 생긴다. 판소리는 그 장터와 마을 마당에서 자랐다.

19세기에 들어서면 양상이 달라진다. 양반과 중인이 후원자로 참여하고, 궁중에서도 불린다. 흥선대원군은 판소리 애호가였고 명창들을 후원했다. 광대의 예술이 지배층의 취향으로 편입되는 과정이다.

판소리는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사라진 일곱 마당의 사설을 복원해 다시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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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후기 문학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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