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 열하일기와 한문단편

1780 · 연암협 / 연행길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문장가다.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재야에서 살았다. 홍대용·박제가·유득공 등과 어울리며 북학파(北學派)를 이뤘다.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이 청 건륭제의 만수절 사절로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가 연경(북경)과 열하를 다녀왔다. 그 기록이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열하일기 — 여행기를 넘어선 여행기】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다. 청의 문물을 관찰하고, 조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논하고, 만난 사람들과 나눈 필담을 옮기고, 그 사이사이에 소설과 우화를 끼워 넣었다.

핵심 주장은 북학(北學)이다. 청은 오랑캐라며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앞선 기술과 제도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벽돌 쓰는 법, 수레 다니는 길, 가축 기르는 방식 같은 실용적 관찰이 이어진다.

당시 조선 지배층의 공식 입장은 북벌(北伐)이었다. 명은 우리가 섬길 나라이고 청은 원수라는 것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이 100년이 지나도록 명분으로 살아 있었다. 그 한복판에서 청을 배우자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발언이었다.

【한문단편 — 이야기로 하는 비판】 박지원의 소설들은 『열하일기』와 『연암집』에 실려 전한다. 모두 짧은 한문 작품이다.

「양반전」은 가난한 양반이 환곡을 갚지 못하자 부자 평민에게 양반 신분을 파는 이야기다. 신분 매매 문서를 작성하는데, 첫 번째 문서는 양반이 지켜야 할 번거로운 예법을 나열하고, 두 번째 문서는 양반이 누리는 특권을 나열한다. 두 번째를 들은 부자가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셈이냐" 하며 달아난다. 양반의 무능과 특권을 동시에 겨눈 풍자다.

「허생전」은 『열하일기』 안에 들어 있다. 가난한 선비 허생이 만 냥을 빌려 과일과 말총을 매점매석해 큰돈을 번다. 조선 경제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실험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어 도적들을 데리고 섬으로 가 이상 사회를 만들려다 실패하고, 마지막에 북벌을 주장하는 이완 대장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했다 거절당하자 호통을 친다. 북벌론의 허구성을 정면으로 찌른다.

「호질」은 범이 위선적인 선비 북곽 선생을 꾸짖는 우화다. 열녀로 이름난 여인이 성이 다른 아들 다섯을 두었다는 설정으로 시작해, 도학자의 이중성을 폭로한다.

【문체반정】 박지원의 글은 문체 자체가 문제가 됐다.

그는 고문(古文)의 격식을 따르지 않고 구어와 속어를 섞은 자유로운 문장을 썼다. 이런 문체가 유행하자 정조는 1792년 이를 잡스럽다 하여 바로잡으려 했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가 그 원인으로 지목돼 반성문 격의 글을 지어 바치라는 명을 받았다.

이 사건은 문체가 곧 사상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격식을 깨는 문장은 격식을 깨는 생각으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박지원의 글은 그러했다.

다만 정조를 단순한 탄압자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박지원의 재능을 인정했고 처벌하지도 않았다. 노론 벽파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문체반정에 섞여 있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무엇을 남겼나】 박지원의 소설은 국문소설과 성격이 다르다. 한문으로 썼으므로 독자는 사대부였다. 즉 그는 양반을 향해 양반을 비판했다.

등장인물도 특이하다. 양반이 아니라 똥 치우는 사람(「예덕선생전」), 거지(「광문자전」), 역관, 말 거간꾼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신분이 아니라 사람됨으로 인물을 평가하는 시선이다.

손자 박규수는 개화파의 스승이 된다. 박지원의 북학 사상이 손자를 거쳐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이 근대 개화 사상으로 흘러가는 통로 가운데 하나가 이 집안이었다.

【그때 조선은】 18세기 후반은 영·정조의 이른바 문예부흥기다. 규장각이 세워지고 서얼 출신도 검서관으로 등용됐다. 박제가·이덕무·유득공이 그렇게 관직에 나갔다.

동시에 한계도 분명했다. 북학파의 주장은 정책으로 거의 채택되지 않았고,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시작되며 개혁의 동력은 사라진다. 박지원은 만년에 안의현감·면천군수 등을 지내며 실제 행정에서 자기 생각을 일부 시험했으나, 조선 전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허생전」의 결말이 상징적이다. 허생은 이상 사회를 만들려다 실패하고, 북벌의 허구를 지적한 뒤 사라진다. 다음 날 찾아가 보니 집은 비어 있었다. 조선 후기 지식인이 도달할 수 있었던 자리가 거기까지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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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후기 문학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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