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 두 개의 타이틀이 흔들리다

1612 · 한양 / 강릉

「홍길동전」은 오랫동안 두 개의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최초의 한글 소설이고, 허균이 지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둘 다 흔들린다.

【줄거리】 조선 세종 때 좌의정 홍상직의 서얼로 태어난 홍길동은 무예와 학문을 익혔으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처지를 한탄한다. 다른 첩이 보낸 자객을 물리치고 집을 떠나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우두머리가 되고, 무리를 활빈당(活貧黨)이라 이름 짓는다.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백성에게 나눠주고, 조정이 잡으려 하자 분신술로 여덟 길동을 만들어 농락한다. 결국 병조판서 벼슬을 받고, 무리를 이끌고 율도국으로 가 왕이 된다.

【무엇이 문제인가 — 두 개의 논쟁】 첫째, 최초의 한글 소설인가.

1997년 채수(蔡壽)가 1511년경 지은 「설공찬전」의 국문본이 발견되면서 이 타이틀이 흔들렸다. 「홍길동전」보다 100년가량 앞선다.

둘째, 저자가 허균인가. 이쪽이 더 복잡하다.

허균 창작설의 유일한 근거는 1674년 간행된 이식(1584~1647)의 『택당집』에 나오는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구절이다. 심재의 『송천필담』, 홍한주의 『지수점필』 등에도 같은 언급이 있으나 모두 『택당집』을 인용한 것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저자를 언급한 다른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다.

【반론의 근거】 저자가 허균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여럿이다.

① 허균의 문집에 「홍길동전」 언급이 전혀 없다. ② 허균은 한문에 능한 문장가로, 「홍길동전」을 빼면 한글로 남긴 글이 하나도 없다. 다른 글은 모두 한문으로 쓰면서 이것만 한글로 쓸 이유가 불분명하다. ③ 현전 「홍길동전」에는 17세기 말 실존 인물인 장길산(張吉山), 그리고 선혜청 같은 후대 요소가 등장한다. 허균은 1618년에 죽었다. ④ 이식이 말한 「홍길동전」과 지금 전하는 「홍길동전」이 같은 작품인지 확인할 근거가 없다.

결정적으로 2019년, 황일호(1588~1641)가 지은 한문 「노혁전(盧革傳)」이 발굴됐다.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한 별개의 작품이다. 홍길동 이야기를 허균만 소설로 쓴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반론에 대한 재반론도 있다.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현전 이본에 후대 요소가 있다 해서 허균이 원작자가 아니라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전하는 국문본은 모두 이본이고 한문본 「위도왕전」조차 국문본을 번역한 것이므로, 원본의 언어를 두고 벌이는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지적도 있다.

학계 상황은 미묘하다. 연구자 다수가 현전 내용은 허균이 지은 것과 거리가 있으리라 여기면서도, 허균이 작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주저한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이본이 말하는 것】 원본은 없고 이본만 많다. 판각본에 경판본·안성판본·완판본이 있고, 필사본과 활자본도 전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본마다 강조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경판본이 서얼 차별이라는 신분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반면, 완판본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비판 의식을 더 부각한다. 후대에 부연된 성격이 강하다.

같은 이야기를 옮겨 적으면서 무엇을 더 강조할지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작자 미상 고전소설을 읽을 때는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느 판본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는 편이 정확하다.

【그때 조선은】 실존 인물 홍길동(洪吉同)은 연산군 때 사람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도적으로 기록됐다. 소설의 배경은 세종 때로 설정됐다.

허균(1569~1618)은 그 자체로 문제적 인물이다. 명문가 출신이면서 서얼과 승려와 어울렸고, 「유재론(遺才論)」에서 신분에 따라 인재를 버리는 제도를 비판했으며, 「호민론(豪民論)」에서는 백성이 두려운 존재라고 썼다. 광해군 때 역모 혐의로 처형됐다.

그의 사상과 「홍길동전」의 주제가 통한다는 점이 허균 창작설을 오래 지탱해온 힘이다. 다만 사상이 통한다는 것과 그가 이 작품을 썼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 구분이 이 논쟁의 핵심이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조선 후기 문학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사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