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리 —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1250 · 고려 개경(개성)

『악장가사』와 『시용향악보』에 전하는 4연 짜리 짧은 노래다. 지은이도 지은 때도 알 수 없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ᄂᆞᆫ /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ᄂᆞᆫ / 위 증즐가 大平盛代(대평성대) 날러는 엇디 살라 ᄒᆞ고 /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ᄂᆞᆫ / 위 증즐가 大平盛代 잡ᄉᆞ와 두어리마ᄂᆞᄂᆞᆫ / 선ᄒᆞ면 아니 올셰라 / 위 증즐가 大平盛代 셜온 님 보내ᄋᆞ노니 나ᄂᆞᆫ / 가시ᄂᆞᆫ ᄃᆞᆺ 도셔 오쇼셔 나ᄂᆞᆫ / 위 증즐가 大平盛代

현대어로 옮기면 이렇다.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 버리고 가시렵니까 // 나더러 어찌 살라 하고 / 버리고 가시렵니까 // 붙잡아 두고 싶지만 / 서운하면 아니 올까 봐 // 서러운 임 보내옵나니 /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네 연의 심리학】 이 노래가 오래 읽히는 이유는 감정의 흐름이 정확하기 때문이다.

1연은 믿을 수 없다는 반문이다. 같은 말을 두 번 되풀이한다. 2연은 원망이다. 나는 어떻게 살라고. 여기까지가 감정의 폭발이다.

3연에서 흐름이 꺾인다. 붙잡고 싶다고 말한 다음, 곧바로 그러면 서운해서 영영 안 올까 봐 못 붙잡겠다고 한다. 붙잡지 못하는 이유가 상대를 향한 배려라는 것이다. 자기 슬픔보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계산한다.

4연은 체념과 기원이다. 보내드리지만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떠남을 인정하면서도 돌아옴을 빈다. "가시는 듯"이라는 세 글자에 이 노래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 가자마자 곧, 이라는 말이면서 동시에 가기는 하되 잠깐만, 이라는 애원이다.

감정을 터뜨렸다가 스스로 눌러 접고, 마지막에 조심스러운 한마디를 남기는 이 구조는 「진달래꽃」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와 정확히 같은 문법이다.

【태평성대라는 후렴】 문제는 후렴이다. 이별의 노래인데 매 연 끝에 "위 증즐가 대평성대"가 붙는다. 태평성대를 찬양하는 말이다.

내용과 완전히 어긋난다. 이 불일치는 이 노래의 이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읽힌다. 원래 민간에서 불리던 이별 노래가 궁중 속악으로 편입되면서, 왕 앞에서 부르기에 적절한 후렴이 덧붙었다는 것이다. "증즐가"는 뜻 없는 흥청거리는 소리이고 거기에 "태평성대"라는 송축이 붙었다.

달리 보면 이 어긋남 자체가 고려가요의 성격을 압축한다. 민중의 정서와 궁중의 격식이 한 노래 안에 겹쳐 있는 것이다.

【이별의 계보】 「가시리」는 한국 시가의 이별 정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그 계보는 길다.

「공무도하가」의 "임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에서 시작해, 「정읍사」의 기다림을 거쳐, 「가시리」와 「서경별곡」에서 갈라진다. 「가시리」가 참고 보내는 쪽이라면 「서경별곡」은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쪽이다. 같은 시대에 정반대 태도의 이별 노래가 공존한다.

이후 황진이의 시조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로, 그리고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이어진다. 특히 「진달래꽃」은 「가시리」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다 — 보내드리겠다고 말하면서 실은 가지 말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그때 고려는】 이 노래가 언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속요 대부분이 무신정권기(1170~1270)와 원 간섭기(1270~1356)를 거치며 궁중에 정착했다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전쟁과 정변이 잦았고 사람들이 자주 헤어졌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했고(1232), 백성들은 산성과 섬으로 흩어졌다. 원 간섭기에는 공녀(貢女)로 끌려가는 딸들이 있었다. 이별이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시대의 일상이던 때다.

「가시리」가 특정 사건을 노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짧은 노래가 그토록 오래 불렸다는 사실은, 그것이 많은 사람의 경험과 맞닿아 있었음을 뜻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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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가요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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