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 두 갈래로 갈라진 고려의 노래

1250 · 고려 개경(개성)

고려의 노래를 부르는 이름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고려가요, 고려속요, 속요, 장가(長歌), 별곡(別曲)… 학계에서도 명칭이 통일되지 않았다. 그 자체가 이 갈래의 성격이 단순하지 않다는 뜻이다.

크게 두 흐름이 있다. 하나는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가 궁중 음악으로 흡수된 속요이고, 다른 하나는 신흥 사대부들이 만들어낸 경기체가다. 앞엣것은 「가시리」·「청산별곡」·「서경별곡」·「동동」처럼 대개 작자를 모르고, 뒤엣것은 「한림별곡」처럼 지은이 집단이 분명하다. 전자가 이별과 삶의 고통을 노래한다면, 후자는 자기들이 아는 것과 가진 것을 자랑한다. 같은 시대의 노래인데 정서가 정반대다.

【어디에 남았나】 고려의 노래는 고려 때 기록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읽는 것은 전부 조선에서 정리한 책에 실려 있다.

우리말로 적힌 것은 『악학궤범』(1493),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세 책에 14편이 남았다. 한문으로 번역된 것은 『고려사』 악지, 이제현의 『익재난고』, 민사평의 『급암선생시집』 등에 14편이 실려, 모두 28편 정도가 전한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하나 붙는다. 이 노래들을 우리말로 적을 수 있었던 것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이기 때문이다. 향가가 향찰이라는 불완전한 표기에 갇혀 20세기까지 읽히지 못한 것과 달리, 고려가요는 15세기에 한글로 옮겨졌다. 그래서 우리는 「가시리」와 「청산별곡」을 옛사람이 부른 소리에 상당히 가깝게 읽을 수 있다.

【남녀상열지사라는 통념, 그리고 반론】 고려가요를 배울 때 늘 따라붙는 말이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이 노래들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곧 남녀가 서로 즐기는 음탕한 노래라 하여 배척하고 삭제했다는 것이다.

근거가 없지는 않다. 성종 때 구악(舊樂)을 정리하며 「서경별곡」 등이 산제(刪除) 대상으로 거론된 기록이 있고, 중종 13년(1518)에는 「정읍사」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궁중에서 폐지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통념을 재검토하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요지는 이렇다. 고려가요를 기록하고 정리해 남긴 사람들이 바로 그 조선 성리학자들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없애려 했다면 애초에 책에 싣지 않았을 것이다. 또 남녀상열지사라는 말은 남녀의 애정을 다룬 노래라는 뜻이지 성애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닌데, 후대에 이를 오해해 "조선이 고려의 노래를 검열해 없앴다"는 서사가 만들어졌다는 지적이다. 실전된 작품이 많은 것은 검열 때문이 아니라 향가가 그랬듯 세월이 지나며 자연히 사라진 결과라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현전 고려가요가 궁중 속악가사집에 실린 노래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을 단순한 민중의 노래가 아니라 고려 왕조의 궁중음악, 즉 악장(樂章)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속요의 형식】 속요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첫째, 연(聯)이 나뉜다. 여러 연이 이어지는 연장체(聯章體)다. 둘째, 후렴이 붙는다. "위 증즐가 태평성대"(가시리),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청산별곡), "아으 동동다리"(동동)처럼 뜻이 불분명한 소리가 반복된다. 셋째, 3음보 율격이 기본이다.

후렴은 특히 중요하다. 대개 뜻이 없는 소리인데, 노래를 부를 때 흥을 돋우고 연과 연을 잇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가시리」의 후렴 "위 증즐가 태평성대"처럼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있다.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는데 후렴은 태평성대를 외친다. 이 어긋남은 민간의 노래가 궁중 음악으로 편입되며 궁중에 맞는 후렴이 덧붙었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노래의 이력이 후렴 한 줄에 화석처럼 남은 셈이다.

【경기체가라는 다른 길】 「한림별곡」에서 시작되는 경기체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각 연 끝에 "경(景) 긔 엇더하니잇고(이런 광경이 어떠합니까)"가 반복되는 데서 이름이 왔다.

이 갈래는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의 이름을 열거한다. 좋은 책, 좋은 글씨, 좋은 술, 좋은 꽃, 좋은 악기를 줄줄이 나열하고 "어떻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래서 서정시가 아니라 교술시(敎術詩)로 분류된다.

담당층은 무신정권기 이후 등장한 신흥 사대부다. 이들은 심(心)이나 리(理)보다 물(物)을, 내면보다 외부를 중시했고, 사물을 호명하는 이 형식이 그들의 진취성과 자부심을 담기에 알맞았다. 「한림별곡」 이후 안축의 「죽계별곡」·「관동별곡」으로 이어지고 조선시대까지 계속 창작된다.

【문학사에서의 자리】 고려의 노래는 향가와 조선 시가를 잇는 다리다.

속요의 3음보 율격과 연장체는 이후 가사(歌辭)로 흘러가고, 경기체가는 조선 악장과 가사의 형성에 영향을 준다. 「정읍사」에서 보이던 3연 6구 구조는 시조의 3장 6구로 정착한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이르러 노래의 화자가 확실히 개인이 된다. 「구지가」의 집단, 「제망매가」의 승려를 거쳐, 「가시리」에서는 이름 없는 한 사람이 떠나는 임을 붙잡지 못하고 서 있다. 그 목소리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들린다는 것이 고려가요의 힘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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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가요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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