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서에 우리가 처음 등장하는 자리는 전쟁이다.
사마천이 기원전 1세기에 쓴 사기의 권115가 조선열전이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와 왕이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 손자 우거왕 때 한 무제와 충돌하고 기원전 108년에 왕험성이 무너지기까지가 내용이다. 항복을 두고 내부가 갈라지고 신하들이 왕을 죽이는 대목까지 꽤 자세하다.
다만 이 기록에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 별로 없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거의 안 나온다. 전쟁 기록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에게 조선은 무제의 정복 사업 가운데 한 항목이었다.
짚어 둘 것이 하나 있다. 사기를 우리 관련 최초의 기록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하지 않다. 관자나 산해경 같은 더 이른 문헌에 조선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다만 그 책들은 성립 시기와 지금 전하는 텍스트의 연대가 서로 다른 문제가 있어서 성격이 다르다. 사기는 최초라기보다, 고조선을 다룬 현존 중국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초기 기록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생활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다음 책이다.
1세기에 반고가 쓴 한서에는 조선전이 따로 있지만, 정작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대목은 열전이 아니라 지리지에 있다. 연 지역을 설명하는 대목에 낙랑 조선 사람들의 법이 적혀 있다. 이른바 범금팔조다.
원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남의 것을 훔친 자는 남자면 그 집의 노로, 여자면 비로 삼는데, 스스로 죄를 씻으려면 한 사람에 오십만을 내야 한다.
여덟 조라고 했지만 전하는 것은 이 셋뿐이다. 나머지 다섯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팔조법금이라는 이름으로 여덟 개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글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대목의 진짜 재미는 그다음에 있다.
한서는 이어서 이렇게 적는다. 죄를 씻고 평민이 되어도 사람들이 여전히 부끄럽게 여겨 혼인할 짝을 찾지 못했다고. 그래서 그 백성은 끝내 서로 훔치지 않았고 문을 닫지 않았다고(無門戶之閉).
여기까지가 낙랑군이 설치되기 전, 혹은 설치 초기의 모습이다.
그런데 같은 문단이 이렇게 끝난다. 군에서 처음에 요동에서 관리를 데려왔는데, 관리들이 백성이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을 보았고 장사꾼들도 오갔으며, 밤이면 도둑질이 생겨 풍속이 점점 얇아졌다고.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이렇다. 지금은 금하는 조항이 늘어 예순 몇 조에 이른다(至六十餘條).
중국 관리가 자기 손으로 적은 기록이다. 우리가 들어가기 전에는 문을 안 잠그던 곳이었는데, 우리가 들어가고 나서 법조문이 여덟에서 예순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이 문장을 어떻게 읽을지는 여러 갈래다. 문을 안 잠갔다는 서술 자체가 중국 지식인이 즐겨 쓰던 이상적인 옛 사회의 관용구라고 보는 시각이 있고, 실제 사회 변화를 반영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어느 쪽으로 읽든 한 가지는 남는다. 기록자는 자기 쪽에 불리한 이야기도 적었다는 것이다.
남의 기록을 읽는 일이 늘 손해만은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사료 읽는 법. 이 두 책의 화자는 정복한 쪽이다. 사기는 전쟁을 적었고 한서는 그 뒤에 세운 군의 사정을 적었다. 그러니 여기 나오는 조선 사람들의 모습은 다스리는 쪽에서 본 모습이다. 그 자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고 읽되, 그 자리에서도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적을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함께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