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일어났나.**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느라 진 빚으로 프랑스 재정이 무너졌다. 왕은 특권층에게도 세금을 물리려다 막히자 165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한다. 신분별 한 표씩 표결하는 구조에 반발한 제3신분이 스스로를 국민의회라 선언했고, 헌법을 만들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를 함락했다. 요새 안 죄수는 일곱 명뿐이었고 군중이 그곳에 간 진짜 이유는 화약이었다.\n\n한 달 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채택되었다.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문장이었다. 이 선언은 장식이 아니었다 — 같은 달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고 이듬해 귀족 칭호 자체가 사라진다. 태어난 신분이 사람의 자리를 정한다는 원리가 공식적으로 부정되었다.\n\n1791년 왕이 국경으로 달아나다 바렌에서 붙잡혔다. 왕을 헌법 아래 두려는 구상은 그 밤에 끝났다. 압송되는 길에 아무도 모자를 벗지 않았다고 전한다.\n\n**그때 한반도는.** 정조 13년이었다. 1791년 신해통공으로 시전 상인의 독점권을 폐지했고, 같은 해 신해박해가 일어나 천주교도 두 사람이 처형되었다. 1793년 장용영을 설치해 국왕 친위부대를 두었고, 1794년 수원 화성 축조를 시작한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설계했고, 동원된 인부에게 임금을 지급한 기록이 남아 있다.\n\n파리에서 왕의 성이 무너지던 무렵 한양에서는 왕이 새 성을 쌓고 있었다. 다만 두 왕이 하려던 일이 완전히 반대는 아니었다. 정조 역시 특권 세력을 누르려 했고, 신해통공은 상업 독점을 깬 조치였으며, 화성은 그 구상의 거점이었다.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 프랑스에서는 특권을 아래에서 무너뜨렸고, 조선에서는 왕이 위에서 눌렀다.\n\n**도착하기까지.** 이 혁명의 소식은 당대 조선에 실질적으로 오지 않았다. 다만 파장은 다른 통로로 왔다. 신해박해와 그 뒤 신유박해(1801)에서 천주교가 「무부무군의 사학」으로 낙인찍힌 배경에는, 유럽에서 왕을 죽인 사상이라는 인식이 청을 거쳐 흐릿하게 전해진 정황이 있다. 사상보다 공포가 먼저 도착한 셈이다.\n\n왕을 제한하려던 구상이 왕이 스스로 도망친 하룻밤에 무너졌다. 권력자가 자기 서명을 스스로 부인할 때, 그 사회는 무엇을 근거로 다음을 결정하게 될까?
③ 프랑스 혁명 상 — 왕을 세운 성, 왕을 무너뜨린 광장
이 글은 혁명, 그때 우리는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