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일어났나.** 1688년 영국 의회가 국왕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네덜란드에서 윌리엄과 메리를 불러들였다. 이듬해 권리장전이 제정되어 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법을 정지시키거나 세금을 걷을 수 없게 되었다. 40여 년 앞선 청교도혁명이 국왕을 처형하고도 결국 왕정으로 되돌아간 뒤에 온 두 번째 시도였고, 이번에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왕을 없애지 않고 왕의 권한을 문서로 묶은 것이다.\n\n**그때 한반도는.** 조선은 숙종 재위 14년이었다. 이듬해인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난다.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삼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했으며, 송시열이 사약을 받았다. 숙종 대에는 이런 환국이 세 차례 반복된다.\n\n비교해 보면 방향이 정반대다. 런던에서는 신하들이 왕을 갈아치웠고, 한양에서는 왕이 신하 집단을 통째로 갈아치웠다. 둘 다 권력이 격렬하게 이동한 사건이지만, 영국의 환국은 왕권을 제한하는 문서를 남겼고 조선의 환국은 왕권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n\n**도착하기까지.** 이 소식이 조선에 닿는 데는 200년이 걸렸다. 경로는 두 갈래였다. 하나는 청을 통한 한역 서양서적이었는데 주로 지리·천문·역법이었고 정치 제도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19세기 말 일본을 통한 유입이었다. 1880년대 개화파가 접한 입헌 사상은 대체로 일본어 번역을 거친 것이었고, 일본이 메이지 헌법을 만들며 참고한 것은 영국형이 아니라 프로이센형이었다. 우리에게 도착한 입헌군주제는 이미 한 번 굴절된 상태였다.\n\n그럼에도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자고 요구했을 때, 그 구상의 뿌리에는 런던의 그 문서가 있었다. 왕을 없애지 않고 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형태 자체가 그것이었다. 요구는 그해 겨울 무력으로 해산되며 좌절된다.\n\n**세계사적으로는** 이 사건이 이후 혁명들의 원형이 되었다. 왕의 권력이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통치받는 사람들과의 계약에서 온다는 관념이 문서로 확정되었고, 이 논리는 100년 뒤 대서양 건너에서 훨씬 급진적인 형태로 다시 쓰인다 — 계약을 어긴 왕은 갈아치울 수 있다면, 아예 두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n\n같은 시기에 벌어진 두 사건이 왜 이토록 다른 곳으로 갔을까? 그리고 200년의 시차는 그저 거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받아들일 준비의 문제였을까?
① 명예혁명 — 200년 걸려 도착한 소식
이 글은 혁명, 그때 우리는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