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 대부분은 『삼국유사』 권2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온다. 삼국사기에는 가야를 다룬 본기가 없다. 신라·고구려·백제만 있다.
일연은 이 글이 자기가 쓴 것이 아니라고 밝혀 두었다. 고려 문종 때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를 지낸 어떤 문인이 지은 것을 줄여 실었다고 적었다.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일연이 옮겨 적은 축약본으로만 가야의 건국 신화를 알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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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가 — 거북아 거북아**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서기 42년) 3월, 계욕일이었다. 이 지역에는 아직 나라가 없었고 아홉 명의 간(干)이 각각 백성을 다스리고 있었다.
구지봉이라는 봉우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삼백 명이 모이자 사람 목소리가 들렸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이 답했다 — 저희가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구지입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셨다. 그래서 왔다. 너희는 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하고 춤추어라.
그 노래가 「구지가(龜旨歌)」다.
거북아 거북아 / 머리를 내어라 / 내놓지 않으면 / 구워서 먹으리
(龜何龜何 / 首其現也 / 若不現也 / 燔灼而喫也)
사람들이 노래하며 춤추자 하늘에서 자줏빛 줄이 내려왔다. 줄 끝에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합이 있었고, 그 안에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열이틀 뒤 알에서 여섯 아이가 나왔다. 열흘 남짓 만에 키가 아홉 자가 됐다. 그달 보름에 맨 먼저 나온 이가 왕위에 올랐다. 처음 나타났다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 했다. 나라 이름은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했다.
나머지 다섯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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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와의 대결**
수로왕이 다스릴 때, 바다에서 배 한 척이 왔다. 석탈해였다. 그가 말했다 —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다.
수로가 답했다. 하늘이 나에게 왕위를 명했으니 함부로 줄 수 없다.
탈해가 술법으로 겨루자고 했다. 탈해가 매로 변하자 수로는 독수리가 됐고, 탈해가 참새로 변하자 수로는 새매가 됐다. 탈해가 항복하고 물러갔다.
(앞 편에서 본 신라의 석탈해가 여기 다시 등장한다. 두 이야기가 서로를 참조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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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수로왕이 즉위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 청하자 왕이 말했다 — 하늘이 정해 줄 것이다.
어느 날 왕이 신하를 시켜 망산도에서 기다리게 했다. 과연 서남쪽 바다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왔다.
배에서 내린 여인이 말했다 — 나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요,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이다. 부모가 꿈에 상제의 명을 받고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왕과 왕비가 되어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아들 열을 낳았다. 왕비는 자기 성을 잇게 해 달라 청했고, 두 아들이 허씨 성을 이었다. 오늘날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같은 뿌리로 여겨지고 서로 혼인하지 않는 관습이 여기서 나왔다고 전한다.
허황옥은 157세, 수로왕은 158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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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국은 어디인가**
이 대목이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아유타를 인도 갠지스 강 유역의 고대 도시 아요디아(Ayodhya)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김해에는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이 전한다. 인도에서 온 공주라는 서사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김해와 아요디아 사이에 자매결연이 맺어지기도 했다.
반면 학계에서는 신중한 견해가 우세하다. 아유타를 인도로 특정할 근거가 이 기록 외에 없고, 서기 1세기에 인도에서 한반도 남단까지 직접 항해했다는 것은 당시 항해 기술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국 남부나 동남아시아 어딘가를 가리킬 가능성, 혹은 불교가 전래된 뒤 후대에 덧붙은 설정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가야가 바다를 통해 외부와 활발히 교류한 나라였다는 점이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일본계 유물이 나오고, 낙랑과 왜를 잇는 중계 무역의 흔적이 확인된다. 철이 풍부해 낙랑과 왜에 수출했다는 기록도 중국 문헌에 있다.
바다 건너에서 왕비가 왔다는 이야기는, 그런 나라의 자기 인식과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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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기록이 중요한가**
가야는 562년 신라에 병합됐다. 승자의 역사에서 패자의 기록은 잘 남지 않는다. 김부식이 가야 본기를 두지 않은 것도 그 연장선이다.
그런데 일연은 이 글을 통째로 옮겨 실었다. 덕분에 우리는 가야 왕들의 계보와 재위 연도, 도읍의 구조, 왕릉의 위치까지 알게 됐다.
고고학은 이 기록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한다. 김해 일대에서 대규모 고분군이 확인됐고, 철기 생산의 흔적이 나왔으며, 수로왕릉으로 전하는 무덤이 지금도 김해 시내에 있다. 물론 기록의 연대와 고고학적 연대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삼국이라는 틀에서 밀려난 네 번째 나라의 이야기가, 밀려난 이야기를 줍겠다는 책에 실려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