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으로부터 790년이 지난 1925년, 망국의 사학자 신채호가 조선의 신문 지면에서 그 사건을 다시 불러냈다.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 조선 역사 천년에서 가장 큰 사건은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아니고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라는, 당대로서는 파격의 선언이었다(이 글은 뒤에 『조선사연구초』에 실린다). 그의 독법은 이렇다. 묘청 대 김부식의 싸움은 단순한 반란과 진압이 아니라, 낭가(郎家)와 불교로 대표되는 자주·진취의 사상과 유교로 대표되는 사대·보수의 사상이 조선의 운명을 걸고 벌인 결전이었다. 그리고 김부식이 이겼기 때문에 —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으로 천년을 흘러, 끝내 나라를 잃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프레임 안에서 삼국사기는 승전국의 전리품이 된다. 신채호가 보기에 김부식은 사대주의의 자로 우리 고대사를 재단해, 만주 벌판의 웅혼한 역사를 반도 안으로 쪼그라뜨리고 유교 명분에 맞지 않는 기록을 지운 장본인이었다. 김부식 = 사대주의의 원흉이라는,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대중적 초상은 대부분 이 글에서 태어났다.
그 독법의 힘과 한계를 함께 적는다. 힘 — 신채호는 역사 서술 자체가 권력이라는 것, 즉 어떤 싸움에서 누가 이겼느냐가 이후 천년의 "쓰는 자리"를 결정한다는 통찰을 조선 사학에 처음으로 정면 제기했다. 이 시리즈가 김부식의 "자리"를 묻는 방법론 자체가 사실 신채호에게 빚지고 있다. 한계 — 그 글이 쓰인 자리 역시 읽어야 한다. 나라를 잃은 지 15년, 망국의 원인을 역사 속에서 찾아야 했던 절박함이 이분법을 날카롭게 갈았다. 자주 대 사대의 칼로 자르면 12세기 고려의 현실 — 요와 북송을 연달아 집어삼킨 금의 국력, 정벌론의 실현 가능성, 서경 세력 내부의 문제 — 은 베어져 나간다. 신채호의 김부식이 하나의 해석이듯, 신채호 자신도 그의 시대가 낳은 해석자였다.
공정을 위해 덧붙이면 — 신채호가 겨눈 과녁에는 실제로 맞은 부분이 있다. 앞서 5편에서 본 신라 중심의 기울기, 백제에 내려진 가혹한 판결(9편), 그리고 유교적 재단으로 잘려나간 기록들(4편)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사실들로부터 "천년 사대의 원흉"까지 직선을 긋는 일이다. 다음 편에서는 그 직선에 반대하는 쪽의 논거들을 같은 무게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