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은 1075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 신라 왕실 김씨의 후예로 전해지는 가문이다. 증조부 김위영은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접수할 때 경주 지역의 책임자(주장)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이 가문은 천년 왕국 신라가 문을 닫을 때 새 왕조에 승선한 옛 수도의 지배층이었고, 김부식 대에 이르러 그 승선은 완전한 성공이 된다. 부식을 포함한 네 형제 — 부필·부일·부식·부철 — 가 모두 과거에 급제해 문한(文翰)을 잡았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 김부식의 이름과 인상을 기록해 갈 만큼, 그는 고려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여기서 이 시리즈의 핵심 긴장 하나를 짚고 가야 한다. 고려는 나라 이름부터가 고구려의 계승이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옛 서울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승격시켜 제2의 수도로 삼았고, 북진(北進)은 왕조의 공식 이념이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조정을 채운 문벌 상당수는 — 김부식의 가문처럼 — 신라의 후예였다. 나라의 간판은 고구려인데, 나라를 운영하는 붓은 신라에서 왔다. 이 어긋남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위기의 순간에 단층선처럼 드러나게 된다.
김부식 개인의 이력은 그 단층선의 개경 쪽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과거 급제 후 한림원과 사관(史官)을 거쳤고, 송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유교 경전의 강의자로 왕 앞에 섰다. 그가 배우고 가르친 것은 공자의 자로 세상을 재는 법 —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큰 나라와 작은 나라 사이에는 지켜야 할 예(禮)가 있다는 세계관이었다. 이 세계관에서 하늘 아래 두 명의 황제란 있을 수 없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무모가 아니라 무도(無道)다.
1126년, 그 세계관이 시험대에 오른다. 여진족의 금(金)이 요를 멸망시키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온 것이다. 한때 고려에 조공하던 여진이었다. 조정은 격론 끝에 사대를 받아들였고 — 이자겸 정권의 결정이었다 — 바로 이듬해 금은 북송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황제 부자를 포로로 잡아갔다(정강의 변). 김부식의 눈앞에서, 예를 저버린 큰 나라조차 저렇게 무너졌다. 이 장면을 기억해 두자. 9년 뒤 서경에서 "금을 정벌하자"는 목소리가 일어났을 때, 그리고 훗날 그가 백제 멸망에 사론을 달 때, 김부식의 붓 뒤에는 언제나 이 장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