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람 이규보가 남긴 『백운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김부식이 어느 날 시를 짓는데, 죽은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뺨을 때리며 꾸짖었다는 것이다 — 네가 감히 내 시를 넘보느냐. 물론 설화다.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의 기록이다. 고려 최고의 문장가 김부식과 천재 시인 정지상. 두 사람은 같은 조정에서 벼슬했고, 문학적 라이벌로 소문났으며 — 1135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처형했다.
정지상은 서경 사람이었고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에 섰다. 김부식은 개경 문벌의 정점이었고 그 운동을 토벌한 총사령관이었다. 그리고 출정하기도 전에, 반란과의 연루를 이유로 정지상을 먼저 베었다. 사적 원한이 섞였다는 뒷말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따라다닌다 — 귀신 설화는 그 뒷말이 이야기의 옷을 입은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반란을 진압한 그 사람이 왕명을 받아 책 한 권을 완성한다. 『삼국사기』 — 현재까지 전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다.
이 시리즈는 그 책을 "쓴 사람"에서부터 읽는다. 삼국유사 시리즈에서 우리는 몽골 침략기의 늙은 승려 일연이 왜 설화와 향가를 주웠는지를 보았다. 이번에는 그보다 백여 년 앞서, 문벌귀족 전성기의 재상이 왜 설화를 걷어내고 유교의 자로 역사를 다시 쟀는지를 본다. 김부식은 누구였나 — 사대주의의 원흉인가(신채호는 그렇게 불렀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이자 자국사의 정립자인가(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그가 백제에 내린 판결문은 왜 1,350년 뒤 중국 시안의 땅속에서 나온 돌들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가.
미리 밝혀 둔다. 이 시리즈는 김부식을 단죄하지도 복권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 역사가의 자리 — 그가 태어난 가문, 그가 밟고 선 승자의 서사, 그가 살아낸 국제정세 — 를 복원해서, 천년을 간 프레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본다. 역사서를 읽는 가장 깊은 방법은 그 책이 서 있는 자리를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