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대한민국 사법사에서 가장 오래 재직한 대법원장이 일제 강점기의 판사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경력이 해방과 정권 교체를 거치는 동안 오히려 승진의 발판이 됐다는 사실이다.
민복기는 을사조약·한일합방에 협력해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은 민병석의 아들로, 1913년 태어났다. 1936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1939년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로 임용됐고, 이와모토 후쿠키라는 창씨명으로 해방 때까지 판사로 근무했다. 그가 선고한 판결 가운데 조선민족혁명당 관련 이초생 사건, 강원도 춘천의 항일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 등이 훗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는 근거가 됐다 — 독립운동가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기록이다.
해방 이후 그의 경력은 끊기지 않았다. 미군정 치하에서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재임용됐고, 이승만 정부에서 법무부 검찰국장·법무국장·대통령 비서관·법무부 차관을 거쳐 1955년 검찰총장에 올랐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대법원 판사로 복귀했고, 1963년 박정희 정부의 법무부 장관을 지낸 뒤 1968년 제5대 대법원장에 취임해 1978년까지 10년 2개월간 재임했다 — 한국 사법사 최장수 대법원장 기록이다.
그의 대법원장 재임 기간은 유신체제와 겹친다. 1975년 4월 8일, 그가 재판장을 맡은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해 8명에게 사형을, 나머지에게 무기·중형을 확정했다 — 사형은 확정 18시간 만에 집행됐다. 1971년에는 검찰이 공안사건 무죄 판결에 반발해 현직 판사들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전국 판사 415명 중 153명이 사표를 던진 이른바 ‘사법파동’이 그의 재임 중 벌어지기도 했다.
민복기 개인의 사례가 예외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군정법령 제21호로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을 그대로 존속시켰고, 이는 식민지 시기의 법조 인력과 관행이 신생 대한민국의 사법·검찰 조직에 구조적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됐다. 1948년 반민특위가 친일 청산에 나섰을 때도, 이승만 정부와 결탁한 친일 경찰들이 조직적으로 반민특위를 방해하고 무력화시켰다 — 이 사건은 사법·검찰뿐 아니라 경찰을 포함한 국가 수사·형벌 기구 전반이 식민지 유산과 단절하지 못한 첫 장면으로 기록된다.
민복기는 2007년 별세할 때까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돼 있다 — 그가 유죄를 선고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묘역과 60미터 거리다. 이 사실 자체에 대한 평가(서훈 취소·현충원 안장 자격 재검토 여부)는 현재도 정치적·입법적으로 논의되는 사안이며, 이 글은 그 결론을 대신 내리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의 경력이 식민지 사법 권력에서 독재 정권의 사법 권력으로 끊김 없이 이어졌다는 사실 자체는, 이 시리즈가 다루는 ‘검찰과 사법부는 어떻게 신뢰를 잃어왔는가’라는 질문의 가장 오래된 답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