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사법 절차가 정권의 도구로 완전히 장악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 그리고 그것을 되돌리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다.
1974년 4월, 박정희 정부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하며 그 배후로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 변란을 꾀한 지하조직’인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했다. 중앙정보부는 관련자 23명을 전격 구속했다.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가 2005년 확인한 바에 따르면, 조사 과정에서 반인권적 고문이 가해졌고 조사·공판 기록이 조작 시나리오에 맞춰 작성됐다. 재판은 긴급조치 제2호로 구성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진행됐는데, 2심은 공개 변론 없이 서면으로만 이뤄졌다.
1975년 4월 8일, 민복기 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은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상고를 기각해 서도원·도예종 등 8명에게 사형을, 나머지에게 무기징역과 징역 15~20년을 확정했다.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이일규 대법관 한 명만이 원심 파기를 주장하는 소수의견을 냈다 — 12 대 1이었다. 사형은 확정 판결 다음 날인 4월 9일, 18시간 만에 집행됐다. 제네바 소재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유족들의 면회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경찰은 사형 집행 다음 날 연미사를 준비하던 희생자 시신을 탈취해 강제로 화장했다 — 이를 막으려던 문정현 신부가 영구차에 깔려 크게 다쳤다.
이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사실은 30년 가까이 지나서야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2002년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발표했고, 2005년 국정원과거사위원회가 가혹행위와 사건 조작을 인정했다. 같은 해 12월 27일 재심이 받아들여졌고,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은 사형이 집행된 8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해 8월 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해 시국사건 사상 최대 규모인 637억여 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2013년 11월에는 1차 인혁당 사건(1964년)에 대해서도 재심 무죄가 선고돼, 두 차례에 걸친 인혁당 사건 모두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됐다.
이 사건의 판결문 자체가 30년 가까이 사실상 비공개 상태였다는 사실도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통상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은 판례공보에 실려 공개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사건 판결문은 그렇게 되지 않았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옛 신문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재심을 진행한 서울중앙지법 검찰은 2006년 이례적으로 구형 없는 논고를 했다 — 검찰 스스로 이 사건의 유죄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사건에는 앞선 시리즈의 다른 사건들과 다른, 드문 장면도 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사건을 담당한 공안부 검사 3명(이용훈·김병리·장원찬)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기소할 수 없다며 서명을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 검사장이 다른 검사를 시켜 결국 기소를 강행했지만, 이 저항은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됐다. 그리고 2007년 재심 무죄 선고 이후, 1975년 당시 유일하게 소수의견을 냈던 이일규 전 대법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우리 대법원이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조직 전체가 침묵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뒤늦게라도 스스로 오류를 인정한 목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 시리즈가 유명·부정의를 함께 기록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확정된 사실을 정리하면 이렇다. 8명이 사형당했고, 판결이 조작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국가기관 스스로의 조사로 확인됐으며, 32년 만에 재심으로 전원 무죄가 확정됐다. 사법부가 정권의 도구로 완전히 기능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결과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오류를 바로잡는 데 국가가 얼마나 오랜 시간과 얼마나 많은 목숨을 지불했는지 — 이 사건은 그 두 질문에 대한 가장 무거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