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5일, 장마를 앞두고 송산리 6호분의 배수로를 파던 인부의 삽에 벽돌이 걸렸다. 아무도 모르던 무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공주에서 천 기 가까운 백제 무덤을 파헤친 가루베 지온도 바로 옆 6호분까지 손을 댔으면서 이 무덤은 끝내 찾지 못했다.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유일한 무덤이었다.
7월 8일 입구를 열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열몇 시간 만에 유물 수천 점을 들어냈다. 기자들이 몰려들어 현장이 아수라장이 되자 조사단은 서둘러 끝내는 쪽을 택했다. 어느 유물이 어디에 어떤 상태로 놓여 있었는지를 기록하는 일이 발굴의 절반인데, 그 절반이 날아갔다. 왕비의 머리맡에 놓였던 물건들의 정확한 배치, 관을 덮었던 직물의 상태 같은 것을 우리는 이제 알 수 없다.
한국 고고학은 이 발굴을 최대의 성과이자 최대의 실패로 함께 기록한다. 그 뒤 발굴 절차와 현장 통제 규정이 크게 바뀌었고, 무덤은 1997년부터 영구 폐쇄되어 지금은 옆에 만든 모형관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남은 것이 있다. 무덤 입구에 놓인 두 장의 돌, 지석이다. 그 돌 덕분에 우리는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가운데 어느 쪽이 맞았는지 알고, 백제사 전체의 연대를 맞추는 기준점 하나를 얻었다. 발굴은 서툴렀지만 무덤은 자기 이름을 스스로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