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를 가장 오래, 가장 깊이 지배한 사상은 송시열의 것이었다. 그를 빼고 이 시기를 설명할 수 없다.
계보는 김장생에서 시작한다. 이이의 문인이었던 그는 충청도 연산에 살며 예학을 세웠다. 예학이란 관혼상제의 절차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조선 후기에 이것이 왜 중요해졌는가가 관건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 질서가 무너진 뒤, 그 질서를 다시 세울 구체적 규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념이 아니라 절차가 사회를 붙든다는 판단이었다.
송시열은 김장생의 제자다. 충청도 회덕에서 태어나 효종의 스승이 됐고, 북벌의 이념적 기둥이 됐다. 만년에는 괴산 화양동에 머물며 제자를 길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유배됐다가 국문을 위해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여든셋이었다.
그의 반대편에 허목과 윤선도가 있었다. 허목은 남인의 영수로 예송에서 송시열과 정면으로 맞섰고, 윤선도는 해남에 근거를 둔 남인 논객이자 어부사시사를 지은 시인이다. 윤선도는 예송에서 서인을 공격하다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핵심 사상
송시열의 핵심은 하나다. 주자의 해석은 완결되었으므로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학자의 일이다.
이것을 완고함으로만 읽으면 그가 왜 그토록 강경했는지 놓친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오랑캐라 부르던 청에게 무릎을 꿇었다. 명은 망했다. 그렇다면 중화의 문명은 어디에 남아 있는가. 송시열의 답은 조선이었다. 명이 사라진 지금 그 정통을 잇는 것은 조선뿐이라는 것이다.
이 자의식을 소중화라 부른다. 그리고 그 정통의 구체적 내용이 바로 주자학이었다. 주자의 해석을 흔드는 것은 조선이 붙들고 있는 마지막 자존을 흔드는 일이 됐다.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벌론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청을 칠 수 있다고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지만, 적어도 그것은 굴복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허목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주자 이전의 고대 경전으로 직접 돌아가려 했고(고학), 예송에서도 왕은 사대부와 같은 예법을 따를 수 없다는 왕권 특수론을 폈다. 같은 유학 안에서도 어디를 기준으로 삼느냐가 이렇게 갈렸다.
당대의 역할
예송논쟁이 왜 상복 문제로 국가를 뒤흔들었는지는 예학의 위상을 알아야 이해된다.
예학은 절차의 학문이지만, 그 절차가 곧 관계의 규정이다. 누가 누구에게 몇 년 복을 입느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정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효종의 상복 문제는 왕이 사대부와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를 묻는 문제가 됐다.
송시열의 답은 예법은 보편적이라는 것이었고, 허목의 답은 왕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조선 붕당사」에서 이 논쟁을 자세히 다뤘다.
송시열의 영향력은 그의 사후 오히려 커졌다. 노론이 그를 정통으로 삼아 조선 말까지 집권했고, 그는 송자(宋子)라 불렸다. 공자·맹자·주자에 붙는 호칭이 조선인에게 붙은 유일한 경우다.
논쟁
송시열만큼 평가가 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비판하는 쪽은 그가 사상의 다양성을 질식시켰다고 본다. 윤휴와 윤증을 사문난적으로 몰았고, 그의 사후 노론의 장기 집권과 함께 학문의 경직이 굳어졌다는 것이다. 그가 김익훈의 거짓 역모 사건을 감쌌을 때 젊은 관료들이 반발해 노론과 소론이 갈린 것도 이 맥락에서 거론된다.
옹호하는 쪽은 그의 처지를 강조한다. 두 차례 전란으로 나라의 정신적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세우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대동법 확대와 노비종모법을 지지하는 등 민생 정책에서는 개혁적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가 세운 기준이 조선 후기 2백 년의 사상적 지형을 결정했다는 것. 이 시리즈에 나오는 윤휴, 박세당, 정제두, 그리고 실학자들 대부분이 그가 세운 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와 씨름했다.
오늘 읽기
위기의 시대에 무엇을 붙들 것인가.
송시열의 답은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그 선택은 조선에 정신적 중심을 주었고, 동시에 그 중심을 검증할 목소리를 지웠다.
그가 없었다면 조선 후기의 사상은 더 자유로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이 시리즈가 다룬 이단들의 무게는 그가 세운 벽의 높이에서 나온다. 벽이 낮았다면 그들이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를 일도 없었겠지만, 동시에 그들의 시도가 그토록 의미심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