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두 — 강화도로 물러나 양명학을 학파로 세우다

1709 · 강화 하곡

생몰
1649~1736
학파
양명학 — 강화학파
연고
강화 하곡
주요 저술
하곡집, 존언, 학변

정제두는 명문가 출신으로 소론에 속했다. 젊어서부터 양명학에 마음을 두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예순한 살 되던 1709년, 그는 강화도로 옮겨 갔다. 정치의 중심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전한다. 그곳에서 스물일곱 해를 살며 제자를 길렀고, 여든여덟에 죽었다.

그의 학문은 후손과 인척을 통해 이어졌다. 이광사, 이긍익, 정동유, 그리고 훗날 이건창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강화학파라 부른다. 「조선 붕당사」에서 당의통략의 저자로 나온 이건창이 이 계보의 끝자락에 있다.

핵심 사상

정제두가 양명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는 왕양명의 심즉리를 수용하면서도 조선 성리학의 문제의식을 유지했다.

그가 특히 붙든 것은 진실성이다. 당시 조선 학계가 주자의 말을 외우고 되풀이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고 보았다. 말과 행동이 갈라진 상태, 곧 위학(가짜 학문)에 대한 비판이었다.

양명학의 지행합일은 그 비판에 정확히 맞는 도구였다. 알면서 하지 않으면 아직 안 것이 아니라는 명제는, 학문이 출세의 수단이 된 현실을 겨눌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실심(實心), 곧 참된 마음을 강조했다. 이 개념이 강화학파의 실학적 성향으로 이어진다. 이광사의 서예,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같은 실증적 역사 서술, 정동유의 언어 연구가 모두 이 학풍에서 나왔다.

당대의 역할

강화학파의 존재 방식 자체가 조선 사상계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기 학문을 공개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양명학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걸지 않았고, 저술도 널리 유포하지 않았다. 가학(家學)의 형태로, 혈연과 혼인으로 이어진 좁은 범위 안에서 전해졌다.

그렇게 2백 년 가까이 이어졌다. 정통이 아닌 사상이 조선에서 살아남는 방식이 이러했다 — 중앙에서 멀어지고, 소리를 낮추고, 가족 안에서 물려주는 것.

박은식과 정인보 같은 근대 학자들이 강화학파에 주목한 것은 그런 맥락이다. 이들은 강화학파에서 조선 사상의 자생적 비판 역량을 찾으려 했다.

논쟁

강화학파의 규모와 영향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견해가 갈린다.

조선 양명학의 결실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소수 가문에 국한된 흐름이어서 조선 사상계 전체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정제두를 순수한 양명학자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다. 그는 주자학과 양명학 사이에서 독자적 종합을 시도했고,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 읽기

주류가 아닌 생각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정제두의 답은 물러나는 것이었다. 정면으로 부딪쳐 이기려 하지 않고, 강화도라는 변방으로 옮겨 소리 없이 이어갔다. 윤휴가 부딪쳐 죽은 것과 대조된다.

어느 쪽이 옳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정제두의 방식으로 그 사상은 2백 년을 살아남았고, 결국 근대의 학자들에게 발견됐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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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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