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휴와 박세당 — 주자를 고쳐 쓴 대가

1680 5월 · 경기도 여주 · 양주 석천동

생몰
윤휴 1617~1680 · 박세당 1629~1703
학파
이단으로 몰린 사상
연고
여주·공주 · 양주 석천동(의정부)
주요 저술
백호전서, 중용주해, 사변록, 색경

윤휴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젊은 시절 송시열과 교유했고, 두 사람이 서로를 인정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관계가 틀어진 것은 그가 중용을 독자적으로 주해하면서다.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 곧 유학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라 규정했다. 예송논쟁에서 남인 편에 서면서 대립은 정치로 번졌다.

숙종 초 남인이 집권하자 윤휴는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무너지자 그도 함께 몰렸고, 그해 사약을 받았다. 예순셋이었다.

박세당은 소론계 문신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양주 석천동에 은거하며 농사를 짓고 저술했다. 일흔넷에 사변록이 문제되어 사문난적으로 몰렸고, 삭탈관직된 뒤 그해에 죽었다.

핵심 사상

두 사람이 한 일은 같다. 경전을 주자의 주석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읽으려 한 것이다.

조선 성리학에서 경전 해석의 표준은 주자였다. 사서집주가 곧 정답이었고, 학자의 일은 그 정답을 이해하고 부연하는 것이었다.

윤휴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경전의 뜻이 주자 한 사람에게 독점될 수 없다고 보았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전한다. 그는 중용을 새로 나누고 새로 풀었다.

박세당의 사변록도 같은 방향이다. 그는 주자의 해석이 지나치게 사변적이며 경전의 본뜻에서 멀어졌다고 보았다. 그의 관심은 실제 쓰임에 있었다. 농서 색경을 직접 쓴 것도 같은 태도에서 나온다.

윤휴는 학문에 그치지 않았다. 북벌을 실제로 추진하자고 주장하며 병거를 만들고 지패법으로 호구를 파악하자는 구체적 제도 개혁안을 냈다. 상평창과 세제 개혁도 논의했다.

당대의 역할

왜 경전 해석이 사형에 이를 문제였는가.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주자의 해석은 단순한 학설이 아니라 체제의 근거였다. 그것을 고쳐 쓴다는 것은 나라의 기초를 다시 놓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게다가 시기가 나빴다. 병자호란으로 청에 굴복한 뒤 조선 지배층은 명이 망한 지금 중화의 정통을 잇는 것은 조선뿐이라는 자의식(소중화)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 정통의 내용이 바로 주자학이었다. 주자를 흔드는 것은 그 마지막 자존까지 흔드는 일이었다.

송시열이 유독 강경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 주자 해석의 통일은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존속 문제였다.

논쟁

윤휴의 죽음을 사상 탄압으로만 볼 것인지는 논쟁이 있다.

그는 경신환국이라는 정변 속에서 남인의 핵심 인물로 처벌됐다. 죄목에도 학문 문제보다 정치적 혐의가 앞섰다. 순수한 사상 탄압이 아니라 권력 투쟁의 결과라는 해석이 그래서 나온다.

그러나 사문난적이라는 낙인이 그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도 분명하다. 학문적 규정이 정치적 제거의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조선에서 학문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한편 윤휴를 반주자주의자로 규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그는 주자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주자의 해석이 유일한 답은 아니라고 했다. 유학의 틀 안에서 다르게 읽을 자유를 주장한 것이지, 유학을 벗어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 읽기

정답이 정해진 사회에서 다르게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윤휴와 박세당이 요구한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책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 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 오늘의 기준으로는 학문의 기본 전제다.

그것이 목숨과 관직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이 조선 후기 사상계의 온도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 온도 속에서도 그들은 썼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사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