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기는 개성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살았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책을 사 모으는 데 재산을 다 썼다고 전한다. 청을 통해 들어온 서양 서적을 구해 읽었고, 천문·지리·의학·수학까지 폭넓게 섭렵했다. 천 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고 하나 상당수가 전하지 않는다.
그가 살던 시기는 조선이 흔들리기 시작한 때다. 세도정치가 절정이었고, 서양 배가 연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죽고 몇 해 뒤 조선은 개항한다.
최한기는 개성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살았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책을 사 모으는 데 재산을 다 썼다고 전한다. 청을 통해 들어온 서양 서적을 구해 읽었고, 천문·지리·의학·수학까지 폭넓게 섭렵했다. 천 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고 하나 상당수가 전하지 않는다.
그가 살던 시기는 조선이 흔들리기 시작한 때다. 세도정치가 절정이었고, 서양 배가 연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죽고 몇 해 뒤 조선은 개항한다.
최한기의 체계를 기학이라 부른다. 서경덕에서 시작된 조선 기철학의 마지막 형태다.
그는 세계의 근본을 기(氣)로 보되, 그 기를 도덕적 원리가 아니라 관찰과 검증의 대상으로 다뤘다. 사람은 감각(신기)을 통해 바깥의 기와 통하고, 그렇게 얻은 경험이 쌓여 앎이 된다. 그는 이를 추측이라 불렀다 — 경험에서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이다.
결정적인 것은 검증에 대한 태도다. 그는 추측한 것이 실제와 맞는지 확인해야 하며, 맞지 않으면 고쳐야 한다고 했다. 선험적으로 주어진 이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알아가고 틀리면 수정하는 방식이다.
이 틀로 그는 서양 과학을 받아들였다. 지구가 돈다는 것, 인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같은 지식을 기학의 언어로 번역해 흡수했다. 서양 것이라 배척하지도, 서양 것이라 무조건 따르지도 않고, 자기 체계 안에서 소화하려 했다.
최한기의 시도는 조선 사상사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
북학파가 청의 기술을 배우자고 했다면, 최한기는 서양의 지식 자체를 자기 철학 체계로 재구성하려 했다. 이는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번역이자 종합이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당대에 거의 읽히지 않았다. 벼슬이 없었고 학맥도 없었으며, 조선은 곧 개항과 격변에 휩쓸렸다. 그가 재발견된 것은 20세기 후반이다.
조선 사상사가 자체적으로 도달한 마지막 지점이 그였고, 그 지점은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못한 채 끊겼다.
최한기를 근대 과학사상의 선구로 평가하는 시각과, 여전히 전통 기론의 틀 안에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갈린다.
검증과 수정을 강조한 것은 분명 실증적이다. 그러나 그가 실험을 수행한 것은 아니며, 서양 과학의 수학적 방법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그의 기학은 여전히 사변적 체계라는 지적이 있다.
다만 이런 평가와 무관하게 분명한 것이 있다. 그는 외부의 지식을 자기 언어로 소화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자기 전통을 버리지도 절대화하지도 않았다.
이 시리즈를 여기서 맺는다. 안향이 원에서 책을 베껴 온 지 6백 년 뒤, 최한기가 서양의 지식을 기(氣)로 옮기려다 죽었다.
그 사이에 이 시리즈가 다룬 사람들이 있다. 조광조는 사약을, 정여립은 멸문을, 허균은 능지처참을, 윤휴는 사약을, 정인홍은 처형을 받았다. 박세당은 사문난적이 되었고 정약용은 열여덟 해를 유배지에서 보냈다.
이들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정도전은 재상의 나라를, 조식은 실천을, 정여립은 주인 없는 천하를, 허균은 호민의 힘을, 윤휴는 다르게 읽을 자유를, 정약용은 아래에서 오는 권력을 말했다.
공통점은 하나다. 정해진 답 바깥에서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조선은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이 시리즈가 던지는 질문은 그러므로 조선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어떤 사회가 자기 근거를 의심하는 사람을 견딜 수 있는가. 그것을 견디지 못하면 무엇을 잃는가.
조선은 정교한 사상 체계를 3백 년간 지켰다. 그리고 그 체계를 검증할 목소리를 그때마다 제거했다. 남은 것은 순수했지만, 스스로를 고칠 힘은 함께 사라졌다.
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