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박지원·박제가 — 오랑캐에게 배우자

1780 · 충청도 천안 · 황해도 연암협 · 한양

생몰
홍대용 1731~1783 · 박지원 1737~1805 · 박제가 1750~1805
학파
실학 — 이용후생(북학파)
연고
천안 수신면 · 연암협 · 한양
주요 저술
의산문답, 열하일기, 북학의

세 사람 모두 청에 다녀왔다. 그리고 돌아와 조선이 잘못 알고 있었다고 썼다.

홍대용은 1765년 사행을 따라 연경에 갔다. 그곳에서 중국 학자들과 사귀고 천문 관측 기구를 보았다. 돌아와 고향 천안에 사설 천문대를 지었다.

박지원은 1780년 청 건륭제의 만수절 사절을 따라갔다. 열하까지 다녀온 기록이 열하일기다.

박제가는 서얼이었다.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하면서 관직에 나갔다. 네 차례 청에 다녀왔고 북학의를 썼다. 1801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다.

핵심 사상

북학파의 출발점은 하나의 불편한 사실이다. 조선이 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한 청이 조선보다 잘살고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명이 망했으니 중화의 정통은 조선이 잇는다는 소중화 의식으로 버텨왔다. 청은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가서 보니 벽돌로 지은 견고한 집, 잘 닦인 도로, 활발한 수레와 상업이 있었다.

박제가는 여기서 급진적 결론을 냈다. 이용후생, 곧 도구를 편리하게 쓰고 삶을 두텁게 하는 것이 먼저다. 그는 특히 소비를 강조했다. 재물은 우물과 같아서 퍼내면 다시 차고 쓰지 않으면 마른다는 것이다. 검약을 미덕으로 삼는 조선의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수레와 벽돌을 쓰고, 바다를 열어 통상하자고 했다.

홍대용은 더 근본으로 갔다. 의산문답에서 그는 지구가 둥글고 스스로 돈다고 했다(지전설). 그리고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고 했다. 중심이 없다면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도 없다. 각자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이다(역외춘추론).

이것은 천문 이론이 아니라 세계관의 전복이었다. 조선이 3백 년간 붙들어온 화이론의 근거를 우주론으로 해체한 것이다.

당대의 역할

북학파의 위치는 미묘했다. 이들은 노론 명문가 출신(홍대용, 박지원)이거나 정조의 후원을 받은 서얼(박제가, 이덕무)이었다. 남인 계열의 경세치용 실학과는 계보가 다르다.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서얼들을 등용해 이들에게 활동 공간을 열어줬다. 신분 때문에 관직에 나갈 수 없던 이들이 국가 학술 기관에 들어간 것이다.

동시에 정조는 문체반정으로 박지원의 문체를 문제 삼기도 했다. 열하일기의 자유로운 문체가 순정한 고문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개혁 군주로 알려진 정조가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논쟁

북학파를 근대적 개화사상의 선구로 보는 시각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배우자고 한 것은 청의 기술과 제도이지 서양의 정치 체제가 아니었다. 신분제 폐지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박제가는 서얼 차별을 비판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겪은 문제였고, 노비제 철폐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홍대용의 지전설도 서양 천문학의 직접 수용이라기보다 전통 기론의 틀 안에서 재구성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다만 화이론의 해체는 분명한 성취다. 문명과 야만의 위계를 상대화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 사상에서 드문 시도였고, 이는 서양 학문을 접하기 전에 자체적으로 도달한 결론이었다.

오늘 읽기

싫어하는 상대에게 배울 수 있는가. 북학파가 마주한 것이 그 질문이었다.

조선은 청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했다. 그 청을 오랑캐라 부르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이자 정체성의 문제였다. 그런데 그 오랑캐가 더 잘살고 있었다.

박제가의 답은 명료했다. 그들이 오랑캐라도 좋은 것은 배워야 한다. 자존심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계속 뒤처질 뿐이다. 이 태도가 나오기까지 병자호란으로부터 150년이 걸렸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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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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