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은 두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광해군 대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서른두 살에 전라도 부안 우반동으로 내려가 스무 해를 은거하며 반계수록을 썼다.
이익의 사정도 비슷했다. 아버지 이하진은 경신환국으로 유배지에서 죽었고, 형 이잠은 상소를 올렸다가 국문 중에 죽었다. 그는 과거를 단념하고 안산 첨성리에 머물며 평생 저술했다.
두 사람 모두 남인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가족이 정쟁에서 죽는 것을 보았다. 조선 실학의 상당 부분이 정치에서 밀려난 남인 계열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앙에서 배제된 자리에서 제도 자체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핵심 사상
두 사람의 출발점은 같다. 조선의 모든 문제가 토지에서 온다는 것이다.
농민이 땅을 잃으면 세금을 낼 수 없고, 국가 재정이 무너지며, 군역을 감당할 인구도 사라진다. 반대로 땅을 소수가 독점하면 그들이 곧 권력이 된다. 그러므로 토지 제도를 고치지 않는 개혁은 다 헛것이다.
유형원의 답은 균전론이다.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나눠주자는 것이다. 그의 반계수록은 토지뿐 아니라 교육, 관제, 군사, 과거 제도까지 국가 전반의 설계도를 담았다.
이익의 답은 한전론이다. 토지 소유의 하한선을 정해 그 최소한(영업전)은 팔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미 사유가 굳어진 현실에서 전면 재분배는 불가능하니, 최소한의 생계 기반만은 지켜주자는 현실적 조정안이었다.
이익은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 폐단도 꼽았다. 노비제, 과거제, 문벌, 기교(사치), 승려, 게으름이다.
당대의 역할
두 사람의 저술은 당대에 채택되지 않았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그가 죽고 백 년 가까이 지난 영조 대에야 간행됐다.
그러나 사람으로는 이어졌다. 이익의 문하에서 안정복, 이가환, 권철신이 나왔고, 그 흐름이 정약용에게 닿는다. 정약용은 이익의 저술을 읽고 학문의 방향을 정했다고 밝혔다.
이익은 또한 서학, 곧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학문에 개방적이었다. 천문과 역법 지식을 적극 수용했다. 다만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었는데, 그의 제자들이 신앙 수용 여부를 두고 갈라지면서 훗날 신유박해의 배경이 된다.
논쟁
실학을 근대 지향의 사상으로 보는 통설은 근래 상당한 재검토를 받았다.
비판의 요지는 이렇다. 유형원과 이익의 구상은 신분제를 전제하고 있으며, 균전론의 분배 기준부터 신분에 따라 차등적이다. 이들이 그린 이상사회는 미래가 아니라 고대 중국의 정전제를 모범으로 삼은 복고적 성격이 강하다.
또한 실학이라는 범주 자체가 2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당대에는 그런 학파 의식이 없었고, 이들은 스스로를 유학자로 여겼다.
다만 이런 재검토가 이들의 성취를 지우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문제를 도덕이 아니라 제도와 물질적 조건에서 찾으려 한 것, 그것을 구체적 설계로 옮긴 것은 그 자체로 사상사의 전환이다.
오늘 읽기
토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부동산이 자산 격차의 핵심이 된 오늘의 한국에서 특히 그렇다.
이익의 한전론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 현실감각이다. 그는 이상적 재분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신 아래를 막는 방식을 택했다. 위를 누르는 대신 바닥을 받치는 것. 오늘의 사회안전망 논의와 발상이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