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은 명의 문신이자 장군이었다. 환관 유근을 비판했다가 귀주 용장으로 좌천됐는데, 그 척박한 유배지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이후 반란을 진압하는 군공도 세웠다.
이지는 왕양명 학파의 급진적 갈래에서 나왔다. 관직을 버리고 삭발한 채 절에 머물며 저술했다. 일흔여섯에 혹세무민의 죄로 체포됐고,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책 제목이 분서(태워야 할 책)와 장서(감춰야 할 책)였던 것은 스스로 그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이라 전한다.
핵심 사상
왕양명의 핵심은 심즉리다. 이치는 바깥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주자는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라고 가르쳤다(격물치지). 배움에는 순서가 있고 축적이 필요하다. 왕양명은 이를 뒤집었다. 이치가 이미 마음에 있다면, 필요한 것은 축적이 아니라 마음의 본래 밝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여기서 지행합일이 나온다. 알면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안 것이 아니다. 앎과 행함은 두 단계가 아니라 하나다.
이지는 여기서 더 나갔다. 그는 동심설을 폈다 — 어린아이의 거짓 없는 마음이 참된 마음이고, 성인의 말씀을 외우며 쌓은 지식이 오히려 그 마음을 가린다는 것이다. 그는 공자의 시비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거부했고, 상인의 이익 추구를 긍정했으며, 여성의 지적 능력을 인정했다.
당대의 역할
조선의 반응은 냉담을 넘어 적대적이었다.
이황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전습록논변을 써서 양명학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마음이 곧 이치라면 사람마다 이치가 달라지고, 그러면 객관적 도덕 기준이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공부의 축적을 건너뛰는 것은 선불교와 다를 바 없다고도 했다.
조선 최고 학자의 이 판정 이후 양명학은 이단으로 굳어졌다. 읽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 됐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수용한 이들이 있었고, 정제두에 이르러 강화학파로 결실을 맺는다.
이지의 책은 더 은밀히 읽혔다. 허균이 그의 저술을 구해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 허균의 파격적 언행과 이지의 사상 사이에 연결을 짓는 해석이 여기서 나온다.
논쟁
조선이 양명학을 배척한 것을 폐쇄성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단순하다.
이황의 비판에는 논리가 있었다. 도덕의 기준이 각자의 마음에 있다면 무엇으로 옳고 그름을 가릴 것인가. 이 우려는 실제로 명 말기에 현실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양명 좌파 일부가 방종으로 흘렀다는 비판은 중국 내부에서도 나왔다.
다만 대가도 분명했다. 조선의 사상계는 하나의 정통을 지키는 데 성공한 대신, 그 정통을 검증할 외부의 시선을 잃었다. 다른 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기 답을 다시 보게 되는데, 그 기회가 차단된 것이다.
일본은 반대였다. 양명학이 활발히 수용됐고 훗날 메이지 유신 주역들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는 해석이 있다. 다만 이 대비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조선의 정체와 일본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논리로 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런 도식은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쉽게 이어진다.
오늘 읽기
이단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배척하면 정통은 순수해지지만 검증받지 못한다. 허용하면 혼란스럽지만 스스로를 시험받는다.
조선은 전자를 택했고, 그 선택은 3백 년간 유지됐다. 그 안에서도 다르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강화도로 물러나 조용히 양명학을 이어간 정제두가 그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