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과 조식 —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사람이 갈라놓은 영남

1570 · 경상도 안동 도산 · 산청 덕산

생몰
이황 1501~1570 · 조식 1501~1572
학파
영남학파 / 남명학파
연고
예안(안동) · 삼가·산청
주요 저술
성학십도, 자성록, 남명집, 학기유편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경상도에 살았다. 그리고 평생 만나지 않았다.

이황은 관직에 나갔다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조정이 부르면 나갔다가 곧 사직을 청했고, 예안(지금의 안동 도산)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다. 도산서당이 그곳이다.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올린 것이 예순여덟 때다.

조식은 아예 나가지 않았다.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물리쳤다. 지리산 자락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제자를 길렀다. 그는 칼을 차고 다녔다고 전한다. 방울을 달아 스스로를 깨우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핵심 사상

이황의 중심은 이(理)다. 그는 이가 스스로 움직인다고 보았다(이기호발설). 도덕의 근거인 이가 능동적이어야 사람이 선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안으로 파고든다 — 마음을 살피고 경(敬)을 지켜 본성을 회복하는 수양이 중심이다. 사단칠정 논쟁에서 기대승과 8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일은 조선 사상사의 정점으로 꼽힌다.

조식의 중심은 실천이다. 그는 경(敬)과 의(義)를 나란히 놓았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고, 밖으로 일을 결단하는 것이 의다. 그가 찬 칼에 이 두 글자를 새겼다고 전한다.

조식은 이론 논쟁에 냉담했다.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천리를 논한다고 당대의 학풍을 비판했다는 말이 전한다. 아는 것보다 하는 것이 먼저라는 태도였다.

당대의 역할

두 사람의 차이는 제자들의 행동에서 뚜렷해진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식의 문인들이 대거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 정인홍, 김면이 모두 남명 문하다. 실천을 강조한 학풍이 그대로 현실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황의 문인들은 조정에서 학문과 제도로 역할을 했다. 유성룡이 대표적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 영의정으로 전쟁을 총괄하고 이순신을 천거했다.

정치적으로도 갈렸다. 이황 계열은 남인으로, 조식 계열은 북인으로 이어진다. 「조선 붕당사」에서 다룬 남북 분당의 학문적 뿌리가 여기에 있다. 영남이 하나가 아니라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다른 색을 띠게 된 것도 이 두 사람에게서 비롯한다.

논쟁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편지에 남아 있다. 조식은 이황에게 헛된 이름을 훔치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전하고, 이황은 조식이 노장에 가깝고 학문의 근본이 얕다고 평했다.

다만 이런 기록을 두 사람의 반목으로만 읽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후대에 두 학파가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그 대립을 소급해 강조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조식을 반체제적 인물로 그리는 서술도 과하다. 그가 명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대비를 궁중의 한 과부라 표현하며 직설적으로 비판한 일은 유명하지만, 그것은 체제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 명분에 입각해 왕을 꾸짖은 것이었다.

오늘 읽기

알기와 하기 중 무엇이 먼저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두 사람은 다른 답을 냈고, 그 답이 제자들의 삶을 갈랐다.

다만 결과만 놓고 조식이 옳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천을 앞세운 남명학파는 임진왜란에서 빛났으나, 인조반정으로 뿌리째 뽑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이론에 무게를 둔 퇴계학파는 안동을 중심으로 3백 년을 이어갔다.

빠르게 타오른 쪽과 오래 남은 쪽. 어느 쪽이 나은지는 무엇을 기준으로 보느냐에 달렸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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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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