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스승 없이 공부했다. 어린 시절 나물을 캐러 갔다가 종달새가 나는 것을 보고 그 이치를 궁리하느라 바구니를 비운 채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는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조광조가 추천한 현량과에도 응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권유로 한 차례 과거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개성 화담 옆에 서재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살았다. 호 화담이 여기서 나왔다.
그의 문하에서 허엽, 박순, 민순 등이 나왔다. 허엽은 허균의 아버지다.
핵심 사상
조선 성리학의 주류는 이(理)를 근본으로 본다. 이는 사물이 그러해야 할 이치이자 도덕의 근거다. 기(氣)는 그 이치가 담기는 재료다.
서경덕은 이 순서를 뒤집었다. 그에게 세계의 근본은 기다. 우주에 가득 찬 기가 모이면 사물이 되고 흩어지면 사라진다. 태허, 곧 텅 빈 듯 보이는 공간도 실은 기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이 죽는 것은 기가 흩어지는 것이지 무언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기일원론이라 부른다. 세계를 도덕적 이치가 아니라 물질적 운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고, 그런 점에서 자연철학에 가까웠다. 그는 수학과 역학에도 밝아 소옹의 상수학을 깊이 팠다.
당대의 역할
서경덕의 영향은 학맥보다 지형에서 드러난다.
그의 기 중심 사고는 훗날 임성주, 최한기로 이어지는 조선 기철학의 계보를 열었다. 또한 이이의 이기론에도 흔적을 남겼다. 이이는 서경덕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문제의식을 흡수했다.
한편 그의 문인 중 상당수가 훗날 정치적으로 유연한 노선을 취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하나의 정통을 절대화하지 않는 태도가 학풍에서 정치 성향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논쟁
이황은 서경덕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가 기에 치우쳐 이를 가볍게 보았다고 비판했다. 도덕의 근거가 약해진다는 우려였다.
이 비판은 핵심을 찌른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기의 운동으로만 설명하면, 사람이 왜 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흐려진다. 성리학이 이를 근본에 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반대로 보면 서경덕의 시도는 도덕에서 자연을 분리해 보려는 초기 형태였다. 다만 그가 근대 과학적 사고를 선취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의 기론은 어디까지나 성리학 내부의 논쟁이었고, 실험이나 관측으로 검증하려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었다.
오늘 읽기
서경덕이 특별한 것은 학설보다 태도일지 모른다. 그는 정통이 세워놓은 답을 받아들이는 대신 스스로 궁리했고, 벼슬을 통해 그 생각을 권력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조선의 사상가 대부분이 정치와 얽혀 목숨을 걸었던 것을 생각하면, 화담에 앉아 기를 궁리하다 죽은 그의 삶은 예외적이다. 그리고 예외였기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