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과 조광조 — 도학정치, 4년 만에 끝난 실험

1519 11월 · 경상도 밀양 · 전라도 능주

생몰
김종직 1431~1492 · 조광조 1482~1519
학파
초기 사림·도학
연고
밀양 · 한양 · 능주(유배지)
주요 저술
점필재집, 정암집

김종직은 경상도 밀양 사람이다. 그의 문하에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이 나왔고 그 계보가 조광조로 이어진다. 사림의 종조로 불리는 이유다.

그가 젊은 시절 쓴 조의제문이 그의 사후에 문제가 됐다.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죽인 옛일을 애도한 글인데, 이것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것이라는 고발이 들어갔다. 1498년 무오사화로 그는 부관참시됐고 제자들이 처형됐다.

조광조는 그 계보의 끝에서 나왔다.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려 그를 발탁했다. 서른네 살에 조정에 들어가 4년 만에 사약을 받았다.

핵심 사상

도학정치란 성리학의 이상을 정치에 그대로 구현하자는 것이다. 조광조에게 이는 비유가 아니라 실행 계획이었다.

그가 밀어붙인 것들을 보면 방향이 분명하다. 현량과를 만들어 시험 성적이 아니라 학문과 행실의 평가로 인재를 뽑으려 했다. 소격서를 폐지해 도교 제사를 없앴다. 향약을 보급해 지방 공동체를 성리학적 질서로 재편하려 했다.

그리고 결정타가 위훈삭제였다. 중종반정의 공신 명단에 부당하게 오른 자들의 자격을 취소하자는 것이었다. 공신 자격에는 토지와 노비가 따라붙었으므로, 이는 훈구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직접 겨눈 조치였다.

당대의 역할

1519년 11월, 기묘사화가 터졌다.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됐고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았다. 서른여덟이었다.

주목할 것은 중종이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조광조를 부른 것도 중종이었고 죽인 것도 중종이었다. 왕의 입장에서 훈구를 견제할 칼이 필요했지만, 그 칼이 왕의 권한까지 규율하려 들자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조광조는 왕에게도 성인이 될 것을 요구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이야기 — 나뭇잎에 꿀로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했다는 — 는 후대의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사실 여부에 이견이 있다. 다만 그 이야기가 오래 전해진 것 자체가 이 사건이 어떻게 기억됐는지를 보여준다.

논쟁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한쪽은 그의 개혁이 조선을 바꿀 기회였고 기득권의 반격으로 좌절됐다고 본다. 사림은 그를 순교자로 기억했고, 선조 대에 복권되어 문묘에 배향됐다.

다른 쪽은 그의 속도와 방식을 문제 삼는다. 4년 만에 국가의 인사·재정·의례를 한꺼번에 뒤집으려 했고, 반대자를 소인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이 지지 기반을 좁혔다는 것이다. 왕에게조차 도덕적 완성을 요구한 것이 결국 왕을 적으로 돌렸다는 지적도 있다.

두 평가는 사실 충돌하지 않는다. 방향이 옳았다는 것과 방법이 무리했다는 것은 함께 성립할 수 있다.

오늘 읽기

개혁의 속도는 얼마가 적당한가. 늦으면 기득권이 재정비할 시간을 주고, 빠르면 저항을 한꺼번에 불러 모은다.

조광조는 후자를 택했고 4년 만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뿌린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의 제자들과 사림은 지방으로 내려가 서원을 세웠고, 반세기 뒤 조정을 장악했다. 다만 그때 그들은 서로 갈라졌다 — 「조선 붕당사」가 이어받는 지점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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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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