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은 어느 날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반세기에 걸친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그 학살을 사화라 부른다.
조선 초의 정치는 개국과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주도했다. 이들은 공신전과 대토지를 쥔 기득권 집단이었다. 성종 대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된 것이 사림이었다. 지방 사족 출신으로 성리학의 명분과 도덕을 앞세웠고, 주로 언론기관인 삼사에 배치되어 훈구를 비판하는 역할을 맡았다. 왕이 만든 견제 장치였다.
충돌은 곧 터졌다. 1498년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발단이었다. 항우가 의제를 죽인 옛일을 빗댄 이 글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것이라는 고발이 들어갔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 등이 처형됐다. 사초에서 시작됐다 하여 사화(史禍)로도 쓴다.
1504년 갑자사화는 성격이 달랐다.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에 얽힌 이들을 보복한 사건으로, 사림뿐 아니라 훈구까지 가리지 않고 죽였다. 정치적 노선의 충돌이라기보다 군주의 사적 복수에 가까웠다.
1519년 기묘사화는 가장 아프게 기억된다.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이 조광조를 발탁해 급진적 개혁을 맡겼다. 조광조는 현량과로 인재를 새로 뽑고, 반정 공신의 위훈을 삭제해 부당하게 받은 공신 자격을 취소하려 했다. 훈구의 물적 기반을 직접 겨눈 것이었다. 반발은 즉각적이었고, 개혁의 속도에 부담을 느낀 중종이 등을 돌리면서 조광조는 사사됐다.
1545년 을사사화는 외척 간의 싸움이었다. 인종의 외척 윤임과 명종의 외척 윤원형이 대립했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이 승리해 반대편과 그에 가담한 사림을 대거 제거했다.
네 번을 겪고도 사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중앙에서 밀려난 이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서원과 향약을 통해 후학을 길렀기 때문이다. 1543년 백운동서원을 시작으로 서원은 전국에 퍼졌고, 이곳이 학문의 거점이자 인적 네트워크의 마디가 됐다. 학맥이 곧 인맥이 되는 구조가 이때 만들어졌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은 마침내 조정을 장악한다. 훈구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사림은 자기들끼리 갈라지기 시작한다. 붕당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짚어둘 것이 있다. 훈구와 사림을 뚜렷이 구분되는 두 집단으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학계에 이견이 있다. 혼인과 학맥으로 얽힌 실제 인물들을 추적해보면 경계가 생각만큼 선명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교과서적 구도는 이해를 돕는 틀이지 그 자체가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