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과 이제현 — 베껴 온 책 한 권에서 시작됐다

1290 · 경상도 순흥 (영주)

생몰
안향 1243~1306 · 이제현 1287~1367
학파
고려말 성리학 도입
연고
순흥(영주) · 개경
주요 저술
회헌실기, 역옹패설, 익재난고

안향은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이다. 원의 수도 연경에 갔다가 주자의 저술을 접하고 손수 베껴 돌아왔다. 주자의 초상도 함께 그려 왔다고 전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호를 회헌이라 지었는데, 주자의 호인 회암에서 한 글자를 딴 것이었다. 사숙(私淑), 곧 직접 배우지 못한 스승을 마음으로 따른다는 뜻을 이름에 새긴 셈이다.

이제현은 한 세대 뒤 사람이다. 충선왕이 연경에 세운 만권당에서 조맹부를 비롯한 원의 일급 학자들과 어울리며 학문을 넓혔다. 그는 원의 간섭기에 고려의 국체를 지키는 외교적 역할도 맡았고, 사략을 비롯한 역사 서술에도 손을 댔다.

핵심 사상

두 사람이 들여온 것은 새로운 철학이라기보다 새로운 기준이었다.

그때까지 고려의 지배적 사상은 불교였다.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말했고, 사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말이 적었다. 반면 성리학은 우주의 이치(理)에서 인간의 도리를 끌어내고, 그 도리로 가족과 국가를 배열하는 체계였다. 세상을 설명하는 동시에 세상을 배치하는 설계도였다.

안향이 특히 힘쓴 것은 교육이었다. 그는 사재를 털어 섬학전이라는 장학기금을 만들어 국학의 재건에 썼다. 사상은 책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전해진다는 것을 알았던 셈이다.

당대의 역할

이 도입이 왜 결정적이었는가는 백 년 뒤에 드러난다.

성리학은 고려 후기의 신진사대부에게 무기를 쥐여줬다.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와 불교 사원의 경제적 특권을 비판할 언어가 생긴 것이다. 그 비판은 도덕적 명분을 갖췄고, 명분은 곧 정치적 힘이 됐다.

순흥에 세워진 백운동서원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 되고 훗날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안향의 연고지였기 때문이다. 사상의 도입지가 그대로 조선 사림의 상징적 출발점이 됐다.

논쟁

다만 이 시기를 성리학의 일방적 승리로 그리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제현만 해도 불교를 전면 부정하지 않았고, 고려 후기 지식인 상당수는 성리학과 불교를 함께 지녔다. 성리학이 불교를 배척하는 이념으로 벼려진 것은 정도전 세대에 이르러서다.

또한 안향이 성리학을 처음 들여왔다는 통설에 대해서도, 그 이전부터 단편적 유입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안향의 역할은 최초의 소개라기보다 본격적 수용의 기점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오늘 읽기

한 사람이 책을 베껴 온 일이 백 년 뒤 왕조 교체의 사상적 근거가 됐다. 사상의 전파에는 시차가 있고, 그 시차 동안 사상은 원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자란다.

안향이 주자의 책을 베낄 때 그가 고려의 멸망을 설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들여온 기준은 결국 고려를 판정하는 자로 쓰였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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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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