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과 정몽주 — 고쳐 쓸 것인가, 갈아엎을 것인가

1392 · 충청도 한산 (서천) · 경상도 영천

생몰
이색 1328~1396 · 정몽주 1337~1392
학파
고려말 성리학
연고
한산(서천) · 영천
주요 저술
목은집, 포은집

이색은 원의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균관을 다시 세운 인물이다. 그 성균관에서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이 함께 배웠다. 훗날 서로를 죽이게 되는 사람들이 한 스승 밑에 있었다.

정몽주는 그중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이색은 그를 두고 우리 동방 성리학의 시조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는 외교에도 능해 명과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을 데려오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고려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토지는 권문세족에게 몰려 있었고 국가 재정은 비어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였다.

핵심 사상

이들의 입장은 흔히 온건개혁파로 불린다. 그 뜻은 이렇다.

제도는 고쳐야 한다. 그러나 왕조 자체는 유지해야 한다. 신하가 임금을 갈아치우는 선례를 만들면, 그 다음에는 무엇으로 질서를 세울 것인가. 성리학이 말하는 명분과 의리는 바로 그 질서의 근거인데, 왕조를 뒤엎으면서 명분을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 된다.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의 전제 개혁(과전법)에 부분적으로 협력하면서도 역성혁명에는 끝내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토지 제도는 고칠 수 있으나 군신의 의리는 고칠 수 없다고 보았다.

당대의 역할

1392년,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들에게 살해됐다. 그가 죽고 석 달 뒤 조선이 섰다.

이색은 살아남았으나 유배와 사면을 반복하며 밀려났고, 1396년에 죽었다. 조선 건국 직전인 1391년 여주로 유배됐던 기록이 남아 있다.

역설적인 것은 그 뒤다. 조선은 자신들이 죽인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떠받들었다. 중종 대에는 문묘에 배향됐다. 새 왕조에 필요했던 것이 바로 신하가 임금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에 충성하다 죽은 자를 기림으로써 조선에 대한 충성을 가르쳤다.

논쟁

온건개혁파를 시대를 못 읽은 보수로 볼 것인가, 원칙을 지킨 것으로 볼 것인가는 오래된 논쟁이다.

한쪽에서는 고려의 모순이 이미 손쓸 수 없는 수준이었고, 왕조 교체 없이는 토지 개혁이 불가능했다고 본다. 실제로 과전법은 역성혁명 세력이 주도해 관철됐다.

다른 쪽에서는 정몽주가 반대한 것이 개혁이 아니라 방법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반대한 것은 신하가 왕을 바꾸는 선례였고, 그 우려가 근거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의 두 차례 왕자의 난이 그 방증으로 거론된다.

오늘 읽기

체제 안에서 고칠 것인가, 체제를 바꿀 것인가. 이 질문은 개혁을 말하는 모든 시대에 반복된다.

나였다면 어느 쪽에 섰겠는가.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는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갈린 것은 그 문제를 만든 틀 자체를 부술 수 있느냐였다. 부수면 빠르지만 다음에 무엇이 올지 보장할 수 없고, 안 부수면 안전하지만 문제가 그대로 남는다.

출처

이 글은 조선 사상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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