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상가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보면 이상한 것이 눈에 띈다. 그중 상당수가 제 명에 죽지 못했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았다. 정여립은 죽고 그 여파로 천 명이 함께 죽었다. 허균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윤휴도 사약을 받았다. 박세당은 사문난적으로 몰려 관직에서 쫓겨났고, 정약용은 열여덟 해를 유배지에서 보냈다. 정인홍은 여든여덟에 처형됐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는가. 대부분은 아니다. 이들이 한 일은 글을 쓰고 제자를 가르치고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대가가 죽음이었다.
이 시리즈는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조선의 사상사를 이기론이니 사단칠정이니 하는 학설의 계보로 정리한 글은 이미 많다. 여기서는 대신 사람에게서 시작한다. 누가, 어디서, 어떤 처지에서, 무엇에 반발해 그렇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그 생각이 왜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는가.
먼저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 시리즈는 조선 성리학을 폄하하지 않는다.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식의 서술은 익숙하지만, 그 뿌리를 따라가면 당파성론과 같은 곳에 닿는다. 조선이 스스로 근대에 이를 수 없는 정체된 사회였다는 전제가 있어야 식민지배가 문명의 전환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조선 붕당사」에서 이 구조를 자세히 다뤘다.
실제로는 그 반대에 가깝다. 이황의 사단칠정론과 이이의 이기지묘는 중국 성리학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밀고 나간 성취였고, 일본 유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서경덕은 기(氣) 하나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독학으로 밀어붙였다. 이런 사상적 밀도를 가진 사회를 정체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질문은 성리학이 나빴느냐가 아니다. 질문은 이것이다. 그만큼 정교한 사상 체계가 왜 이견을 그토록 견디지 못했는가.
답의 실마리는 조선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방식에 있다. 조선은 성리학을 여러 학문 중 하나로 들여온 것이 아니라 나라를 세우는 근거로 삼았다.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 위에 서 있었고, 그래서 성리학의 해석을 흔드는 일은 학문 논쟁이 아니라 체제의 근거를 흔드는 일이 됐다. 주자의 주석을 고쳐 쓴 윤휴가 사문난적, 곧 학문을 어지럽힌 도적이라 불린 것은 과장된 수사가 아니라 그 체제 안에서는 정확한 규정이었다.
또 하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학문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다. 어느 학맥에 속하느냐가 곧 어느 붕당에 속하느냐였다. 그래서 학설의 패배는 관직의 상실이 되고, 때로 목숨의 상실이 됐다. 「조선 붕당사」가 다룬 정치의 지형과 이 시리즈가 다룰 사상의 지형은 사실상 같은 지도의 앞뒷면이다.
이 시리즈는 열일곱 편으로 이어진다. 고려말 안향이 원에서 주자의 책을 베껴 오는 데서 시작해, 조선 마지막 세대인 최한기가 서양 과학까지 기(氣)로 끌어안으려 한 시도에서 끝난다.
그 사이에 갈림길이 여럿 있었다. 왕양명의 심학은 왜 조선에서 배척됐는가. 정여립이 천하는 공물이라 했을 때 그것은 무슨 뜻이었는가. 허균은 왜 서얼을 옹호했는가. 윤휴가 주자의 주석을 고쳐 쓴 것은 무엇을 하려던 것인가.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5백 권은 무엇을 바꾸려 한 것인가.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의 태도를 하나 밝혀둔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을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런 서술은 편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정여립의 사상이 정말 공화주의였는지는 사료가 적어 단정하기 어렵고, 그가 실제로 모반을 준비했는지도 논쟁 중이다. 정약용의 개혁안에도 신분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은 대목이 있다.
그들을 오늘의 기준으로 승격시키는 대신, 그들이 선 자리에서 무엇을 볼 수 있었고 무엇은 볼 수 없었는지를 그대로 적으려 한다. 그래야 그들이 감수한 위험의 크기가 제대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