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은 결국 끝났다. 그런데 그 끝은 아무도 원하던 방식이 아니었다.
순조가 친정을 시작한 1804년 무렵부터 권력은 특정 가문이 독점하기 시작한다.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헌종 대의 풍양 조씨, 철종 대에 다시 안동 김씨. 60여 년 동안 세 가문이 조선을 지배했다. 이것을 세도정치라 부른다.
붕당과 세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붕당은 학맥과 정치적 견해를 공유하는 집단이었다. 명분이 필요했고, 공론의 장에서 자기 주장을 정당화해야 했으며, 상대 당의 비판을 받았다. 반면 세도는 혈연 집단이다. 학문적 근거도 정치적 노선도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왕실과의 혼인뿐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견제할 세력이 없으니 관직이 상품이 됐다. 매관매직이 공공연해졌고, 돈을 주고 벼슬을 산 수령은 그 본전을 백성에게서 뽑았다. 삼정 — 토지세인 전정, 군포인 군정, 환곡 — 이 모두 문란해졌다. 특히 환곡은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구휼 제도였는데, 강제로 빌려주고 이자를 붙여 걷는 수탈 수단으로 변질됐다.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물리는 백골징포, 갓난아이를 장정으로 올려 걷는 황구첨정이 이 시기의 일이다. 정약용은 애절양에서 군포를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생식기를 자른 남자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1862년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항쟁이 전국 70여 곳으로 번졌다(임술민란). 조선의 통치 체제가 지방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여기서 이 시리즈의 핵심 질문 하나가 나온다.
붕당을 조선 멸망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주장이 오래 통용됐다. 그런데 사실관계를 보면 순서가 맞지 않는다. 조선이 가장 심각하게 무너진 시기는 붕당이 치열하던 때가 아니라, 붕당이 사라지고 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때였다. 붕당 정치가 작동하던 17세기에는 대동법이 확대되고 상평통보가 유통됐다. 세도정치기에는 그런 개혁이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문제는 여러 세력이 다툰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다툼이 공적 근거를 요구받느냐 아니냐였다. 붕당은 적어도 명분을 대야 했다. 세도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