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정조가 즉위하며 첫마디로 말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한마디에 조정이 얼어붙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노론 벽파가 그대로 조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곧바로 보복하지 않았다. 24년의 재위 동안 그는 벽파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채 통치했다.
정조의 탕평은 할아버지 영조와 달랐다. 영조가 시비를 덮고 온건한 인물을 고르게 쓰는 완론탕평이었다면, 정조는 각 붕당의 원칙 있는 인물들을 등용해 논쟁하게 하는 준론탕평을 폈다. 옳고 그름을 따지되 어느 한 당이 독점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 장치가 규장각이었다. 왕실 도서관으로 출발했으나 실질은 왕이 직접 기른 인재 집단이었다. 초계문신 제도로 젊은 관료를 재교육했고, 서얼 출신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를 검서관으로 발탁했다. 신분 때문에 관직에 나갈 수 없던 이들이 국가의 학술 기관에 들어간 것이다. 붕당의 인맥 바깥에서 왕의 사람을 기르는 방식이었다.
군사적으로는 장용영을 두어 왕 직속의 군사력을 확보했고, 수원에 화성을 쌓아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설계해 공사에 썼다. 신해통공으로 시전 상인의 독점권을 폐지해 상업의 자유를 넓혔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했다. 이 모든 것이 왕 개인의 능력과 의지에 의존하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정조는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 곧 모든 시내를 비추는 달의 주인이라 칭했다. 왕이 모든 것의 중심에 서는 구도였다.
1800년 정조가 마흔여덟에 갑자기 죽었다. 그러자 그가 만든 체제는 놀랄 만큼 빠르게 무너졌다. 순조가 열한 살로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며 벽파가 정권을 잡았고, 신유박해로 남인계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처형되면서 남인은 사실상 소멸했다. 장용영은 혁파됐다.
정조의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 오래 제기되어 왔으나,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종기를 앓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기록이다. 독살을 뒷받침하는 직접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정조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자주 논쟁이 되는 지점은 그가 개혁 군주였는가 하는 것이다. 상업 진흥과 서얼 등용은 분명한 개혁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지향은 오히려 보수적이어서, 문체반정으로 새로운 문체를 억제하고 주자학의 정통을 강조했다. 개혁과 보수를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함께 볼 것인가는 여전히 논의 중이다.
확실한 것은 결과다. 정조가 죽고 4년 뒤, 붕당 정치 자체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