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서 죽었는가

1762 5월 · 한양 창경궁 문정전 앞

1762년,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다. 여드레 만에 세자는 죽었다. 스물일곱이었다.

조선 왕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유일한 사건이며, 그 방식이 남긴 충격 때문에 오늘까지 해석이 갈린다.

확인되는 사실관계는 이렇다. 사도세자는 열다섯부터 대리청정을 했다. 그 과정에서 영조와 여러 차례 충돌했고, 영조는 자주 세자를 꾸짖고 양위 파동을 일으켰다. 세자에게 정신적 질환의 증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궁인과 내관을 살해하고 무단으로 평양에 다녀오는 등의 행적이 전한다. 1762년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열 가지를 고변했고, 그해 영조는 세자를 폐하고 뒤주에 가두었다.

문제는 이 사실들을 어떻게 엮어 읽느냐다. 그리고 그 해석은 사료를 어디까지 신뢰하느냐에 따라 갈린다.

두 개의 입장

당쟁 희생설

시파 계열 서술, 일부 현대 연구

사도세자는 소론과 남인에 우호적이었다. 노론 입장에서 그가 왕이 되면 신임옥사의 시비가 다시 열리고 자신들이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세자의 언행을 과장해 영조에게 전하고, 부자 사이를 이간했다.

세자의 광증 기록 자체가 사후에 정당화를 위해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은 시기에 정리된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신원에 힘쓴 것도 이 사건이 정치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근거 시파의 시각.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노론 측 변명으로 보는 입장.

개인 비행설

벽파 계열 서술, 한중록에 근거한 해석

세자의 이상 행동은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람을 죽인 일도 여러 건이다. 이것을 모두 정치적 조작으로 돌리는 것은 사료를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영조는 오히려 오래 참았다. 후계자의 상태가 국정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왕조의 존속을 위해 결단할 수밖에 없었다. 세손(정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세자 문제를 정리해야 했다.

근거 혜경궁 홍씨 한중록. 실록·승정원일기의 행적 기록.

결과

오늘날 학계에서는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환원하지 않는 견해가 우세하다. 세자에게 실제로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가 발생하고 악화되는 과정에 영조의 가혹한 양육과 노론의 정치적 압박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개인의 비극과 정치 구조가 함께 작용했다는 해석이다.

다만 사료 자체가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쓰였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한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친정 가문을 변호하려는 동기에서 쓴 부분이 있고, 승정원일기의 관련 기록은 정조가 즉위 후 세초(洗草)를 명해 일부가 지워졌다. 지워진 기록 자체가 이 사건의 성격을 말해준다.

이후 정치는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영조의 처분이 정당했다고 보는 벽파로 갈렸다. 붕당이 이제 죽은 세자에 대한 입장으로 재편된 것이다.

나였다면

나였다면 어느 쪽에 섰겠는가.

다만 이 사건에서 더 유익한 질문은 다른 것일지 모른다. 당시 조정의 신하였다면, 세자의 상태를 왕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할 것인가.

보고하면 세자가 위험해지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세자와 함께 무너진다. 감추면 나라의 후계가 위태로워진다. 그리고 어느 쪽을 택하든, 왕과 세자 중 한 사람의 적이 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신하들이 침묵을 택했다. 그 침묵이 8일간의 뒤주로 이어졌다.

오늘의 거울

이 사건은 정신 질환이 정치적으로 다뤄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세자의 병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적 자산이자 부채로 취급됐다. 병을 감추려는 쪽과 드러내려는 쪽이 있었을 뿐, 낫게 하려는 쪽은 거의 없었다.

또 하나, 기록이 지워진 사건은 영원히 확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조가 승정원일기의 관련 대목을 지운 것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한 일이었으나, 그 결과 이 사건은 260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무엇을 지우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해석의 대상이 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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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붕당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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