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과 소론이 어디서 갈렸는지를 알려면, 충청도의 두 마을 이름을 먼저 알아야 한다.
회덕에 송시열이 살았고 이산에 윤증이 살았다. 두 지명의 앞 글자를 따서 이 사건을 회니시비라 부른다. 스승과 제자였던 두 사람의 불화가 서인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놓았다.
갈등의 뿌리는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에게 있었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있었는데, 성이 함락될 때 함께 죽기로 한 벗들은 죽고 자신은 살아 나왔다. 이 일이 평생의 짐이 됐다. 또 윤선거는 주자의 해석에 이견을 낸 윤휴를 두둔했는데, 주자의 절대적 권위를 지키려던 송시열에게 이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윤선거가 죽은 뒤 윤증이 스승에게 아버지의 묘갈명을 청했다. 송시열이 써 준 글은 성의가 없었다. 박세채가 이미 잘 썼는데 내가 더 보탤 것이 있겠느냐는 식으로, 남의 평을 인용할 뿐 자기 말은 얹지 않았다. 제자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1681년 윤증은 스승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가 부치지 않았다. 신유의서라 불리는 이 글에서 그는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아울러 쓴다고 지적했다. 명분을 내세우면서 실은 권력을 취한다는 비판이었다. 부치지 않은 이 편지가 어떤 경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한편 정치 현장에서도 균열이 있었다. 1680년 경신환국 이후 훈척 김익훈이 남인을 일망타진하려고 거짓 역모를 꾸민 일이 발각됐다. 젊은 관료들이 처벌을 요구했으나 송시열은 김익훈이 스승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로 그를 감쌌다. 이때 삼사의 언관들이 훈척의 정치 행태를 비판하면서 서인 안에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났다.
1684년 4월, 송시열의 제자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했다. 사적인 불화가 국가 차원의 정치 분쟁이 되는 순간이었다.
결과
숙종은 윤증 등을 사문의 죄인이자 세도의 큰 변고라 규정했다. 송시열 역시 윤증과 소론을 윤휴와 같은 부류로 보기 시작했다.
1687년 송시열은 정묘축조서에서 윤선거를 비난하면서 그 외조부 성혼이 임진왜란 때 강화론을 주장했던 것까지 문제 삼았다. 소론은 격렬히 반발했다. 노론과 소론 모두 자신들의 학문적 뿌리인 이이와 성혼이 상대에게 비난받는다고 여기게 된 이상, 두 학파의 분립은 되돌릴 수 없었다.
다만 갑술환국(1694) 이전까지는 양쪽 모두 넓은 의미의 서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했다. 송시열은 소론 박태보의 죽음을 슬퍼했고, 노론과 소론이 손잡고 인현왕후 복위를 시도하기도 했다. 완전한 결별은 다음 세대에 왕위 계승 문제가 얹히면서 이뤄진다.
나였다면
나였다면 어느 쪽에 섰겠는가.
이 사건은 두 겹이다. 겉으로는 사제 간의 감정 문제이고, 안으로는 학문의 권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한쪽은 말한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근본 원리가 있고, 그것을 흔드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파괴다. 다른 쪽은 말한다. 의심할 수 없는 원리라는 것이야말로 권력이 가장 좋아하는 도구다.
덧붙이자면, 이 거대한 분열의 출발점에 묘갈명 한 편에 대한 서운함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할 만하다. 정치사의 큰 갈래가 언제나 큰 이유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거울
정통성의 수호와 이견의 허용 사이의 긴장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눈여겨볼 것은 다른 지점이다.
학문적 이견이 정치적 처벌로 이어지는 통로가 열려 있었다는 것.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었고, 윤증은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당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가 곧 죄목이 될 수 있는 구조에서는, 논쟁이 논쟁으로 끝나지 않는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이후 국왕의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결합하면서, 이 통로는 더 넓어진다. 다음 글의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