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은 열넷에 즉위해 마흔여섯 해를 다스렸다. 그 재위 기간에 정권이 통째로 갈아치워지는 일이 세 번 일어났다. 이것을 환국이라 부른다. 국면을 바꾼다는 뜻이다.
1680년 경신환국. 남인의 영수 허적이 조부의 시호를 받는 잔치를 열었는데 궁중의 기름 천막을 왕의 허락 없이 가져다 썼다. 숙종은 격노했고, 이어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이 나오면서 남인이 대거 축출됐다. 서인이 돌아왔다.
1689년 기사환국.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정하려 했다. 송시열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이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송시열은 제주로 유배됐다가 압송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여든셋이었다.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했으며,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후가 됐다.
1694년 갑술환국. 다시 5년 만에 뒤집혔다.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남인이 탄압하려 하자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내쳤다. 인현왕후가 복위하고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됐다. 1701년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무고의 옥으로 사사됐다. 남인은 이 사건으로 사실상 재기 불능이 된다.
왜 이렇게 급격했는가. 여기에 대한 해석은 갈린다.
한 가지 시각은 숙종의 의도적 통치술로 본다. 한 붕당이 오래 집권하면 왕권을 위협하므로, 주기적으로 판을 갈아엎어 어느 세력도 뿌리내리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숙종 대에 왕권은 강해졌다.
다른 시각은 그 대가를 강조한다. 환국은 상대 당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약과 유배로 이어졌다. 이전까지 남아 있던 공존의 관행이 이 시기에 깨졌다. 상대를 인정하고 논쟁하던 정치가, 지면 죽는 정치로 바뀐 것이다. 붕당 정치의 변질을 말할 때 대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삼는다.
한 가지 더 짚을 것이 있다. 환국의 표면적 계기가 대체로 왕실의 사적 영역 — 후궁의 아들, 왕후의 폐위와 복위 — 이었다는 점이다. 정책을 두고 다투던 정치가 왕실 내부의 인사 문제를 따라 움직이게 되면서, 붕당은 정책 집단에서 왕실 계승 라인에 줄을 서는 집단으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이 변화가 다음 세대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경종과 영조 대에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