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옥사 — 후계자를 정하는 일이 목숨을 건 싸움이 되다

1721 · 한양 창덕궁

1720년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했다. 장희빈의 아들이었다.

경종은 병약했고 후사가 없었다. 그러자 후계 문제가 곧바로 정치의 전면에 나왔다. 노론은 이복동생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세제로 세우자고 밀어붙였고,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노론은 세제 책봉에 그치지 않고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자고까지 요구했다. 왕이 살아 있는데 후계자가 정무를 대신 보게 하자는 것이었다. 소론은 이를 왕을 사실상 밀어내려는 시도로 규정했다.

1721년(신축년)과 1722년(임인년)에 걸쳐 벌어진 이 사건을 두 해의 간지를 따 신임옥사라 부른다.

두 개의 입장

노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왕에게 후사가 없고 건강이 위중하다. 후계를 정해두지 않으면 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 왕조 국가에서 계승의 공백은 곧 내란의 씨앗이다.

또한 장희빈은 국모를 저주한 죄로 사사된 사람이다. 그 아들이 왕위에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불안정하다. 종사의 안위를 위해 결단해야 한다.

근거 노론 4대신. 서인-노론의 인현왕후 지지 계보를 잇는다.

소론

조태구, 유봉휘, 김일경

현재의 왕이 엄연히 재위 중이다. 후계 논의는 왕의 뜻에 따라야 하며, 신하가 앞서 정해놓고 나아가 대리청정까지 요구하는 것은 왕권의 찬탈에 가깝다.

어머니의 죄를 아들에게 물어 왕의 자격을 문제 삼는 것은 연좌다. 그 논리를 허용하면 앞으로 어떤 왕도 신하가 트집 잡으면 흔들리게 된다.

근거 경종의 정통성 옹호. 소론 강경파는 노론을 역모로 규정했다.

결과

소론이 승리했다.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모의했다는 고변이 나오면서 노론 4대신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가 처형됐고, 노론계 인사 수십 명이 죽거나 유배됐다.

그러나 1724년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한다. 이번에는 반대로 소론 4대신이 제거됐다.

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을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난은 진압됐고, 소론은 이후 정치 세력으로서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논쟁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이다. 예송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예학의 해석 문제였다. 신임옥사는 누가 왕이 되느냐의 문제였다. 이제 붕당은 정책이나 학문이 아니라 왕위 계승 라인에 따라 갈렸고, 지면 죽었다.

나였다면

나였다면 어느 쪽에 섰겠는가.

왕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다. 후계를 미리 정해 혼란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현직 왕의 권한을 존중해 기다릴 것인가.

앞의 선택은 안정을 위한 것이지만 현직 권력자를 무력화한다. 뒤의 선택은 정당성을 지키지만 위기 관리에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선택에는 대가가 붙어 있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상대가 이기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거울

권력 승계가 제도로 정해져 있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조선의 왕위 계승은 원칙은 있었으나 예외가 잦았고, 그 예외를 다투는 것이 곧 정치가 됐다. 승계 규칙이 불명확하면 정치는 정책 경쟁이 아니라 후계 줄서기가 된다. 그리고 후계 다툼에서 진 쪽은 정책적 반대자가 아니라 역적이 된다.

이 구조가 40년 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조선 붕당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사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