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논쟁 (2) — 재야는 어떻게 반박하는가

1979 · 대한민국 재야사학계

이번에는 반대편 자리에 앉는다. 환단고기를 옹호하는 재야사학계의 반박 논리를, 역시 가능한 한 그 논리 그대로 전달한다. 첫째, 전승 공백에 대하여 — "금서에 족보를 요구하지 말라." 앞서 11편에서 본 대로, 세조·예종·성종실록에는 「고조선비사」·「삼성기」 등을 전국에서 수거하고 숨기는 자를 처벌한다는 수서령이 실제로 실려 있다. 국가가 공권력으로 없애려 한 책의 계보가 깨끗하게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 재야의 제1논거다. 실록이 수거 대상으로 명시한 서명 중에 '삼성기'가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 이름의 책이 15세기 조선에 실재했음을 국가 기록이 증언하는 것 아니냐는 논리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속에서 암송으로 전해진 유가 경전, 바빌론 유수의 폐허에서 정리된 구약처럼, 위기의 기록은 원본이 아니라 목숨을 건 전승으로 남는다는 반론이다. 1911년 초간본의 부재에 대해서도 — 편찬지가 국내가 아닌 만주였고, 편찬자 계연수가 1920년 피살됐으며, 이후 만주는 전란과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을 통과했다는 정황을 든다. 둘째, 근대 어휘 문제에 대하여 — "전승 중의 윤색과 전체 창작은 다르다." 필사로 전해지는 텍스트에는 베끼는 사람의 시대 언어가 스며들기 마련이며(성경도 불경도 수백 년의 편집·윤색 지층을 갖고 있다), 일부 어휘의 혼입이 곧 내용 전체의 20세기 창작을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반박이다. 최종 정서(淨書)가 20세기에 이뤄졌다면 근대어의 흔적은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셋째, 가림토에 대하여 — 세종실록 정인지 서문의 "자방고전(글자는 옛 전자를 본떴다)" 구절이 실재하는 이상, 훈민정음에 참조된 '옛 글자'의 존재 가능성은 조선 왕조의 공식 기록이 열어둔 문이라는 재반박이다. 유사성의 방향(무엇이 무엇을 닮았는가)은 결국 성립 연대 판단에 달린 문제이므로, 자형 일치가 위서의 증명이 될 수 없다는 논리다. 넷째, 고고학의 침묵에 대하여 — "부재의 증거는 증거의 부재가 아니다." 트로이는 슐리만이 땅을 파기 전까지 시인의 공상이었다. 요하 일대에서 기원전 4천 년대의 홍산문화가 발굴돼 동북아 문명사의 통설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홍산문화의 실재는 고고학적 사실이다 — 다만 그것을 환국·배달과 연결하는 것은 재야의 해석이다), "아직 못 찾았다"와 "없다"를 구분해야 한다는 반론이다. 다섯째, 검증 가능한 적중 기록들 — 오성취루의 천문 시뮬레이션 부합(8편), 광개토대왕릉비의 북부여 출자 구절(10편), 신당서가 확인하는 발해의 독자 연호(11편), 사기가 전하는 유방의 치우 제사(6편)처럼, 환단고기 바깥의 사료·과학과 맞아떨어지는 대목이 무시할 수 없이 존재한다는 것. 위작자가 이 모든 것을 우연히 맞출 확률보다, 진짜 옛 기록의 조각이 전승됐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여섯째, 방법론 비판 — "위서 낙인은 연구의 종결이 아니라 회피다." 그리스 신화와 성경의 초자연적 서사는 상징으로 읽어 학문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자국의 전승 기록에는 유독 실증의 잣대만 들이대 연구 자체를 봉쇄하는 것은 식민사학이 남긴 자기검열이라는 비판이다. 진서 여부와 별개로, 텍스트 안의 검증 가능한 요소들을 하나씩 학문의 테이블에 올리는 것이 학자의 일이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상이 재야 반론의 골격이다. 공정을 위해 한 가지를 덧붙인다 — 재야 내부에도 스펙트럼이 있다. 텍스트 전체를 사실(史實)로 받아들이는 입장부터, "핵심 전승은 오래됐으나 현전본에는 후대의 가필이 섞였다"는 절충론까지 폭이 넓다. 상대 진영을 하나의 목소리로 뭉뚱그리지 않는 것 — 그것이 이 논쟁을 공정하게 보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양쪽의 논거를 항목별로 저울에 올린다.

출처

이 글은 환단고기, 무엇을 말하는가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지도에서 관련 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