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논쟁 (1) — 학계는 왜 이 책을 20세기의 저작으로 보는가

1986 · 대한민국 학계

이 편에서는 강단사학계 — 대학과 연구기관의 주류 역사학 — 가 환단고기를 위서, 즉 근현대에 만들어진 뒤 옛 문헌으로 가탁된 책으로 판단하는 근거를, 가능한 한 그 논리 그대로 전달한다. 반론은 다음 편에서 같은 분량으로 다룬다. 첫째, 전승의 공백. 이 책의 자기 서사에 따르면 신라(안함로)-고려(이암·범장)-조선(이맥)의 저작들이 1911년 계연수의 합편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 어떤 단계의 실물도 없다. 원저자들의 친필본도, 중간 필사본도, 결정적으로 1911년에 30부를 찍었다는 초간본도 단 한 부 발견되지 않았다. 확인 가능한 최고(最古)의 실물은 1979년 이유립 공개본이다. 문헌학의 기본 원칙에서, 물증 없는 전승 주장은 성립 연대의 근거가 될 수 없다 — 따라서 입증 책임은 "1979년 이전으로 소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쪽에 있다는 것이 학계의 출발점이다. 여기에 더해, 1911년 간행을 증언할 유일한 위치의 인물(계연수)의 행적 자체가 대부분 이유립 쪽 전언에 의존한다는 점도 지적된다. 둘째, 언어의 지문. 텍스트에는 시대를 배반하는 단어들이 박혀 있다는 지적이다. 근대에 만들어졌거나 근대적 의미로 쓰인 어휘 — 예컨대 서구 culture의 번역어로서의 문화(文化), 남녀평권(男女平權, 남녀평등)과 부권(父權) 같은 근대 개념어 — 가 고려·조선의 저작이라는 본문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고탑(寧古塔)처럼 청나라 대에 통용된 지명이 그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서술에 나오는 문제도 거론된다. 언어는 지층과 같아서, 20세기의 단어가 15세기의 지층에서 나오면 그 지층의 연대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는 논리다. 조인성 등의 연구가 이 계열의 대표적 작업이다. 셋째, 가림토 문제. 앞서 8편에서 본 대로, 훈민정음과 사실상 같은 자형의 문자가 기원전 22세기에 있었다는 기록은, 창제 원리가 해례본에 문서로 남아 있는 훈민정음의 성립사와 정면충돌한다. 문자학계의 다수 견해는 가림토 자형이 훈민정음에서 역으로 만들어졌다고 본다. 넷째, 고고학의 침묵. 환국·배달·단군조선이 다스렸다는 유라시아~만주~중원의 광역에서, 그런 정치체의 존재를 시사하는 통일적 문화 지층 — 규격화된 유물, 행정의 흔적, 문자 기록 — 이 발견되지 않는다. 신석기 초입(기원전 72세기)의 국가라는 설정 자체가, 국가 성립을 청동기 이후로 보는 고고학 일반론과 어긋난다. 다섯째, 내용의 자기모순과 계통 문제. 같은 사건의 연대가 판본·편 간에 어긋나는 대목, 그리고 1911년보다 앞서 유통된 유사 계통 문헌(「규원사화」 등 — 이 역시 진위 논쟁이 있다)과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는 점이 지적된다. 나아가 1979년본과 1980년대 배포본 사이에 자구가 손질된 흔적이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살아 있는 텍스트처럼 수정되는 책은 고정된 고전이 아니라는 방증으로 읽힌다. 여섯째, 동기의 설명 가능성. 위서론은 이 책의 탄생을 이렇게 재구성한다 — 나라를 잃은 시대, 민족의 유구함과 위대함을 증명해줄 역사가 절실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단군 신앙 운동(대종교 등)의 자장 안에서 그 필요에 답하는 텍스트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위서론의 관점에서도 이 책은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시대의 산물이다 — 다만 그 시대가 고대가 아니라 20세기라는 것이다. 이상이 학계 다수 견해의 골격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대학 강단의 한국 고대사 연구자 절대다수가 이 판단을 공유하며, 환단고기는 학술 사료로 인용되지 않는다. 다음 편에서는 이 여섯 논거 하나하나에 재야가 어떻게 반박하는지를 본다.

출처

이 글은 환단고기, 무엇을 말하는가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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