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덕분에 3·1운동이 무르익었다"? — 위임통치 청원이라는 정반대의 기록

1919 3월 1일 · 서울 탑골공원

주장

영화는 이승만을 3·1운동의 정신적 배후이자 기폭제로 그린다. 그의 독립외교 활동이 국내 만세운동의 토양을 만들었다는 서사다.

반박

기록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1919년 2월, 이승만은 정한경과 함께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 즉각적 독립이 아니라, 일본이 핵심 회원국인 국제기구의 통치를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직후 국내에서 터져 나온 것은 "위임통치 만세"가 아니라 "대한독립 만세"였다. 3·1운동의 실제 준비 주체는 천도교(손병희)·기독교(이승훈)·불교(한용운)를 아우른 민족대표들과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뿌린 학생들이었고, 도화선은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 — 이승만은 이 준비 과정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위임통치 청원은 이후 신채호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세우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격렬히 비판한 사안이며, 1925년 임시정부가 그를 탄핵한 사유 중 하나로 명시됐다. 3·1운동의 공로를 그에게 돌리는 것은, 그 운동이 거부한 노선의 주인공에게 운동의 영예를 씌우는 일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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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건국전쟁」 팩트체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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