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은 누가, 어떻게 그었나

1945 · 미국 워싱턴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소련군은 이미 만주로 진격해 한반도 북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었다.

한밤중에 두 명의 대령이 지도를 놓고 선을 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소련의 남하를 막으면서 수도를 포함할 수 있는 선을 찾아야 했다. 30분 남짓 만에 북위 38도선을 골랐다. 사용한 것은 벽에 걸린 일반 지도였다고 전한다. 한반도 전문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소련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선이 확정되었다.

이 대목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첫째, 이것은 무능이나 무성의의 문제만이 아니다. 급박한 군사적 상황에서 점령 구역을 나누는 일상적 결정이었고, 당사자들은 그것이 영구적 경계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일상적 결정이 한 사회의 운명을 갈랐다는 데 있다.

둘째, 대영제국 편의 1947년 인도 분단과 구조가 같다. 그 국경선은 인도에 와 본 적 없는 법률가가 다섯 주 만에 그었고, 발표는 독립 이틀 뒤였다. 여기서도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은 결정으로, 짧은 시간에, 지도 위에서 정해졌다.

셋째, 그러나 선 하나가 분단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 선이 고착된 것은 이후 3년의 정치 과정과 국제 대립의 결과다. 좌우의 대립,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 두 점령 당국의 정책이 겹쳤다. 한 번의 결정에 모든 책임을 돌리면 그 3년이 사라지고, 반대로 그 결정을 지우면 출발점이 사라진다.

넷째, 이 편의 다른 시점들과 나란히 보아야 한다. 1905년 이 나라는 일본과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각서를 주고받았다. 1882년 조약에는 어려움이 있을 때 거중조정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1945년 이 나라가 그은 선이 오늘까지 남았다.

은혜의 서사로도, 원흉의 서사로도 이 관계는 설명되지 않는다. 결정이 있었고 그 결정에는 이유와 이해관계가 있었으며 결과는 이 반도가 감당했다.

한 사회의 운명이 30분의 회의에서 갈릴 수 있다면, 그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는 쪽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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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