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 세력이 중원을 다스릴 때 늘 같은 문제에 부딪혔다. 중국식으로 바꾸면 정주 사회는 다스릴 수 있지만 초원의 지지를 잃고, 초원의 방식을 고집하면 농경민을 다스릴 수 없었다.
5세기 북위는 앞쪽을 택했다.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고 성씨와 복식과 언어를 중국식으로 바꿨다. 중원 왕조로 인정받았지만 초원 쪽 지지를 잃었고, 그 균열이 왕조를 무너뜨렸다. 흡수는 대가 없는 선택이 아니었다.
거란은 다른 답을 냈다. 유목민은 유목의 법으로, 농경민은 농경의 법으로 다스리는 이중 체제를 만들었다. 관직도 두 계통으로 나누고, 문자도 두 종류를 만들었다. 어느 한쪽이 되는 대신 둘 다인 채로 남은 것이다.
이 방식은 이후 금·원·청이 모두 물려받는다. 초원 세력이 중원을 다스리는 방법이 여기서 완성되었다.
고려는 이 제국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993년 1차 침입 때 서희는 담판에서 고려가 고구려를 잇는다는 논리로 옛 고구려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강동 6주를 얻어 냈다. 초원 제국을 상대로 영토를 넓힌 드문 사례이며, 조공 관계의 틀 안에서도 협상의 여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대결의 절정은 고려 지도의 1018년 시점에서 볼 수 있다.
한 세기 뒤 여진이 거란을 무너뜨리고, 다시 한 세기 뒤 몽골이 모두를 무너뜨린다. 초원의 주인은 늘 바뀌었지만 초원 자체는 비지 않았다.
두 세계 사이에 낀 자리는 늘 불리하기만 할까? 그 자리에서만 가능한 선택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