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1년 중앙아시아의 탈라스에서 당의 군대가 이슬람 세력에 패했다. 그 군대를 지휘한 장수는 고구려 유민의 아들이었다.
제국은 지배의 그물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오가는 그물이었다. 나라가 무너진 뒤 한반도 사람들이 그 그물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이 시기가 다르게 보인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수만 호가 당의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중 일부는 군인이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장군까지 올랐다. 탈라스를 지휘한 사람이 그렇다. 그는 파미르를 넘는 원정을 성공시켜 이름을 얻었지만, 4년 뒤 내란 중에 참소를 받아 처형된다. 제국이 이민족 장수를 쓰는 방식과 버리는 방식이 함께 나타난 사례다.
백제 유민 중에도 당의 장군이 된 사람이 있었다. 서쪽 전선에서 오래 싸웠고, 역시 모함을 받아 옥에서 죽었다가 뒤에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의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생애가 알려졌다.
산둥 지역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이 세운 번진이 있었다. 4대에 걸쳐 세습하며 사실상 독립적으로 다스렸고, 신라·발해와 교역했다. 당의 지방 통제가 무너진 뒤의 풍경이자, 유민 사회가 제국 안에서 자기 권력을 만든 사례다.
강제 이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통일신라 시기 중국 동해안에는 신라 사람들의 거류지가 있었고, 자치 기구와 사찰이 있었다. 장보고는 그 교역망을 기반으로 청해진을 세워 동아시아 바닷길을 쥐었다. 유학생들은 당의 과거에 응시했고, 급제한 사람 중 하나는 돌아와 개혁안을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은둔했다.
장안은 100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소그드 상인과 페르시아계 유민, 일본과 신라의 유학생이 함께 살았고 여러 종교의 사원이 세워졌다. 이 개방성은 실제였다. 동시에 그것은 제도적 평등이 아니라 제국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고, 755년 내란이 터지자 곧 배타적으로 돌아선다 — 이민족 장수에 대한 의심이 커졌고 외국인에 대한 제한이 늘었다.
제국의 개방성은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부터가 필요였을까?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들을 우리는 어느 나라의 역사로 기록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