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를 끌어들인다는 것

676 · 경북 경주

648년 김춘추가 당에 건너가 군사 협력을 논의했다. 그 결과 660년 백제가, 668년 고구려가 무너진다.

이 선택을 두고 오래 논쟁이 있었다.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계통의 나라를 무너뜨렸다는 비판과, 당시 신라의 처지에서 다른 선택이 있었느냐는 반문이 맞선다.

조건을 먼저 놓자. 이 무렵 신라는 백제의 압박에 강하게 몰려 있었다. 대야성이 함락되며 김춘추는 딸과 사위를 잃었고,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다가 억류되어 겨우 돌아왔으며, 왜에도 사신을 보냈으나 성과가 없었다. 당은 마지막 선택지였다.

결과도 놓자. 당은 처음부터 한반도 전체를 편입할 생각이었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두었고, 신라에도 계림대도독부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맹이 아니라 편입의 문법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이어졌다. 670년부터 신라는 당과 정면으로 싸웠고, 675년 매소성과 676년 기벌포에서 이겨 당을 밀어냈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군대에 받아들여 함께 싸웠다 — 당에 맞서는 과정에서 세 나라 출신이 한 편이 된 것이며, 그 경험이 이후 통합의 기반이 된다.

대제국을 상대로 영토에서 밀어낸 사례는 흔치 않다. 동시에 당이 물러선 사정의 절반은 서쪽에 있었다. 같은 시기 토번이 당의 서역 거점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있었고, 두 전선을 함께 감당할 수 없었다. 이긴 쪽의 힘과 진 쪽의 사정을 함께 적는 것이 이 시리즈의 방식이다. 어느 하나만 적으면 과장이거나 폄하가 된다.

남은 것은 경계선이다. 신라가 확보한 것은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선까지였고, 옛 고구려 땅의 대부분은 그 밖에 남았다. 30년 뒤 그 자리에 발해가 서고,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를 잇는다고 적었다.

이것을 통일의 완성으로 볼 것인가, 불완전한 통합으로 볼 것인가는 지금도 갈린다. 이 아틀라스는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두 가지를 함께 적는다 — 한반도 남부의 세 나라가 하나의 정치 단위로 묶인 것은 사실이고, 북쪽의 넓은 영역이 다른 길로 갔다는 것도 사실이다.

절박한 처지에서 내린 선택을 우리는 결과만 놓고 평가해도 될까? 그리고 그 선택을 비판할 때, 우리는 그때 그들에게 있던 선택지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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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당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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