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국제법의 언어로 벌어진 첫 대결이다. 두 개의 행정 문서가 5년 간격으로 같은 섬을 각자의 판도에 올렸다 — 그리고 이 둘의 비교가 오늘날 논쟁의 핵심 전장이다. 먼저 대한제국. 1900년 10월 25일 고종은 칙령 제41호를 재가해 관보에 공포했다 —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하고, 군수의 관할 구역을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석도(石島)"로 명시한 것이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코앞의 댓섬이고, 관건은 석도다. 한국 측 해석 — 석도(石島)는 곧 독도다. 논거는 언어의 계보다. 당시 울릉도 개척민의 다수가 전라도 출신이었는데, 전라 방언에서 돌(石)은 "독"이다. 돌섬은 곧 "독섬"으로 불렸고, 이를 뜻으로 적으면 석도(石島), 소리로 적으면 독도(獨島)가 된다 — 실제로 6년 뒤의 공문서(심흥택 보고서)에 "독도"라는 표기가 처음 등장하면서 이 계보가 완성된다. 일본 측 반박 — 석도가 독도라는 직접 증거(당대에 석도=독도를 명기한 문서)는 없으며 석도는 관음도 등 다른 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재반박 — 관음도와 댓섬은 "울릉전도"에 이미 포괄되거나 죽도로 명기돼 있어 석도의 후보에서 빠지며, 울도군의 관할이 실제 도민의 어로권(독도 포함)을 반영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해석 논쟁이 있음을 숨길 필요는 없다 — 중요한 것은 이 칙령이 관보 공포라는 근대 국제법적 형식을 갖춘 국가 행정 조치이며, 일본의 조치보다 4년 4개월 앞선다는 시간 관계다. 다음은 일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졌고, 9월에는 시마네현 어업가 나카이 요자부로가 "량코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정부에 냈다 — 목적은 독도 강치잡이 독점권이었다(다음 편에서 상세히). 흥미로운 사실: 나카이 본인의 이력서 등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애초 독도를 한국령으로 알고 대한제국 정부에 임차를 청원하려 했다. 내무성 담당자 역시 "한국령이라는 의심이 있는 일개 불모의 암초를 취해 열강에 일본의 한국 병탄 야심을 의심케 하는 것은 이익이 작지 않게 사태가 크다"며 반대했다 — 이 문장들은 모두 일본 측 사료에 남아 있다. 그러나 외무성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가 뒤집었다. "시국이야말로 그 영토 편입이 급무다. 망루를 세우고 무선 또는 해저전신을 설치하면 적함 감시에 극히 유리하다" — 러일전쟁의 군사 논리였다. 각의는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타국이 점유했다고 인정할 형적이 없는 무주지"로 규정해 편입을 결정했고, 시마네현이 2월 22일 고시 제40호로 "다케시마"를 오키도사 소관에 편입했다. 이 조치의 문제를 세 겹으로 정리한다. ① 자기모순 — 1877년 태정관지령으로 "관계없다"고 확정한 섬을 "무주지"라 부를 수 있는가. 게다가 오늘날 일본 정부는 "17세기 이래 고유 영토"를 주장하는데, 고유 영토를 새로 편입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그래서 일본 정부 설명은 "영유 의사의 재확인"이라는 절충 표현을 쓰는데, 이는 각의 결정문의 "무주지" 문언과 다시 충돌한다). ② 상대국의 선행 조치 — 1900년 칙령으로 대한제국의 행정 편제가 앞서 있었다. ③ 절차의 은밀성 — 중앙정부 관보가 아닌 일개 현 고시였고, 당사국인 대한제국에 통보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이를 알게 된 것은 1년여 뒤, 그것도 우연에 가까운 경위였다 — 그 장면이 심흥택 보고서다. 1906년 3월 시마네현 조사단이 울릉도에 들러 편입을 통지하자, 울도군수 심흥택은 즉시 상부에 보고했다. 문서의 첫 구절 — "본군 소속 독도(本郡所屬獨島)가 본군 바깥바다 100여 리에 있는데…" "독도"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현존 최초의 공문서이며, 군수가 통지를 받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본군 소속"이라 전제한 것 자체가 당대 행정의 인식을 증언한다. 보고를 받은 참정대신 박제순은 지령 제3호로 응답했다 — "독도가 일본 영지가 되었다는 설은 전혀 근거가 없다(全屬無根)." 그러나 그것이 문서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을사늑약(1905.11)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뒤였기 때문이다 — 항의를 전달할 외교 창구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독도 편입이 "한국 침략의 최초 희생물"이라 불리는 이유가 이 시간표에 있다.
1900 칙령 제41호 vs 1905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 4년 4개월의 차이
출처
- [정부·공공기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관보 제1716호)
- [기록보존소] 일본 각의결정(1905.1.28)·시마네현 고시 제40호
- [기록보존소] 심흥택 보고서·의정부 참정대신 지령 제3호
- [기록보존소] 나카이 요자부로 이력서·사업경영개요 (일본 측 기록)
이 글은 독도, 기록의 섬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